진리의 발견 - 앞서 나간 자들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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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즉시 고전이 된 베스트셀러”라니, 홍보가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리의 발견”이라는 제목도 거대한데 출간과 동시에 고전의 반열에 들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책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걸까. 840쪽의 책 두께는 고전에 가까웠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대개 벽돌 두께를 가볍게 넘는 법인데 『진리의 발견』도 못지않은 부피를 자랑한다. 그럼에도 읽게 된 계기는 미리보기로 읽어본 에피소드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토막토막 연재된 글들이 흥미로웠다. 이렇게 존재감있는 부피의 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가볍고 아름다운 문체였다.


책의 발문에서 다시 한번 흐믓해졌다. 올리버 색스의 친구였던 위스턴 휴 오든의 문장이었다. 올리버 색스와 관련 된 모든 것을 애정할 준비가 된 나에게 책 두께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별들이 타오른다면

우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하지만 우리가 보답할 수 없다면

동등한 애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좀더 사랑하는 쪽이 내가 되도록 해야지

- 위스턴 휴 오든


결론부터 말하자만 프롤로그부터 퐁당 빠져버렸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무슨 밑줄을 이렇게 많이 치고 색색깔의 택은 또 어찌나 많이 붙였는지. 시는 아닌데 시 같은 울림이 있는 문장이 책 속에 한가득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전기인 듯도 하고 네 세기에 걸친 역사서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게 이 책은 하나의 맥락였다. 여성에 대한, 여성을 사랑한 여성의, 여성과 여성의 이야기였다.


책은 케플러부터 시작한다. 정확히는 케플러의 어머니에서 시작한다. 케플러가 우주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쓴 책 《꿈》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마녀로 몰린다. 사람들이 책의 우의적 묘사를 곧이곧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케플러는 어머니가 고초를 겪은 이유가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를 불학무식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본성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결정한 사회적 위치”였다는 말이다. 『진리의 발견』의 저자 마리아 포포바는 사회가 세운 한계를 뛰어넘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지만 마거릿 풀러, 에밀리 디킨슨 그리고 레이철 카슨을 중심에 놓고 있다. 이 세 인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인물들이 살아간 시대의 상호관계와 주변 인물 사이의 연결점을 살필 때 한 인물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독립된 개인이라는 환상”, “타자라는 환상”을 탈피할 때 더 큰 진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이란 다른 삶과 얽힐 수밖에 없으며, 그 삶의 직물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만 인생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에 어렴풋이나마 답을 구할 수 있다. pp.15-16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장편 서사시《오로라 리》의 모델이 된 마거릿 풀러는 미국의 여류평론가, 편집자, 여권운동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고 그녀의 드라마틱한 일생이 놀라웠다. 에머슨의 초월주의 운동을 함께 했고 죽기 전에 이탈리아의 해방운동에 참여해 그 과정을 글로 남겼지만 그녀의 가족과 함께 바다에 수장됐다. 열다섯 살의 나이에 “나는 탁월해지기로 했습니다.”라고 선언했던 풀러는 “천재가 될 수 있는데, 누가 여편네가 된단 말인가?”라고 물으며 자신만의 길을 갔다.


《오로라 리》를 좋아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극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안에서 침잠했고 자신의 사랑에 몰두했다. 에밀리의 뜨거운 문장 뒤에는 수전이 있었다. 에밀리는 수전을 향한 사랑을 시에 고스란히 담았다. 수전은 먼저 에밀리의 친구였지만 후에 그녀의 오빠와 결혼한다. 평생 가까이 살면서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다. 저자는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시인으로서만이 아닌 여성을 사랑한 여성의 삶으로 다룬다.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다우면서도 모호한 의미로 마음을 설레게도 하고 꾸짖기도 하는” 그녀의 시들은 오랫동안 “후대에 남기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일로 여겨졌다.”


『침묵의 봄』으로 잘 알려진 레이첼 카슨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눈길을 끈 것은 그 책과 말라리아 창궐의 연관성을 언급한 부분이었다. 『침묵의 봄』을 주제로 한 토론 모임에 참여했었다. 책에 관한 이야기가 한참 오가던 중 이 책이 아쉬운 부분이라며 어떤 분이 한 말을 『진리의 발견』에서 다시 만났다. 레이첼 카슨이 살충제 사용을 억제한 덕분에 말라리아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토론 당시에는 사실관계를 몰라서 침묵했다. 마리아 포포바에 따르면 그러한 악의적인 주장은 카슨을 반대하던 쪽에서 퍼뜨린 허위주장이었다. 내 머리 속에 든 수많은 허위 중 하나라도 수정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침묵의 봄》이 출간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 내가 이 책에 대한 논평을 트위터에 공유했을 때 누군가가 2500단어로 된 논평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답글을 달았다. 그는 당시의 허위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말라리아로 100만명이 사망한 책임을 카슨에게 돌렸다. 문화의 세포에 일단 자리 잡은 허위의 반감기가 이토록 길다. p.763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은 거미줄같은 책이다.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 속에 책 속 다른 인물의 인생 한 부분이 지나기도 하고 수세기를 앞뒤로 오가기도 한다. 어쩌면 이 많은 인물들이 서로서로 이렇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또 포포바는 그걸 어떻게 알아챌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책의 목차에는 각 장이 하나의 인물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표시돼 있지만 책 내용 전체는 흐르듯이 연결된다. 앞장의 인물은 뒷장에 또 그 다음에 계속 등장한다. 그리고 목차에 표시된 인물 뿐 아니라 들으면 알만한 반가운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칼 세이건 같은. 특정인의 전기적 사실을 읽는다기 보다 어떤 흐름에 이끌린다는 기분으로 읽기를 권한다.


저자는 “아름다움 같은 어떤 진실은 상상과 의미 부여라는 빛을 슬쩍 비출 때 가장 명확하게 보인다”는 말을 저술의 기본 태도로 삼았다. 인물에 대해 끝없이 상상하고 그들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기존에 알았던 그녀들의 모습보다 더 선명하고 친근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마리아 포포바가 묘사하는 장면이 현실과 얼마나 가까운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상상과 의미부여가 있었기에 새로운 마거릿 풀러와 에밀리 디킨슨 그리고 레이첼 카슨의 진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나게 아름답고 견고한 진실을 말이다.


아름다운 삶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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