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창 - 제주4.3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김홍모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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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들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 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4‧3 유격대 호소문 pp.158-159


제주 4‧3 ‘유격대 350여명이 도내 12개 지서와 서북청년회 숙소를 습격하며 도민에게 보낸 호소문’이다. 잘 안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한국 근대사는 슬쩍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외세에 저항하기 위한 힘도 모자란 때에 언제나 내분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얼마전 읽은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는 하와이 한인 사회가 이승만 지지 세력과 박용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갈등하는 장면이 배경으로 등장했었다. 제주의 항일 독립운동과 4‧3을 다룬 『빗창』에서는 더 처절한 역사를 확인했다. 일본인이었던 한국인이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참혹하게 동족을 학살한 그 사건이 아직 종료되지 않은 채였기 때문이다.


『빗창』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기획으로 네 명의 작가가 그리고 쓴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중 하나다. 김홍모 작가는 이 작품을 위해 제주도를 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과 감수’에 주안점을 둔 기획에 집중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책의 곳곳에서 드러난다.제주도의 풍광, 해녀들의 생활상, 독특한 제주 사투리가 작품 속에 잘 녹아 있다. 작가는 제주해녀항일운동과 4‧3을 연결해 다루면서 여성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피해자로서의 여성만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서 해방정국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힘 있게 다루고 싶었어요.”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작가 인터뷰 中 - 출판사 창비 사이트


미량, 재인, 련화. 세 명의 주인공은 1932년 해녀항쟁을 주도했던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을 극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빗창을 움켜쥐고 당시 제주도 도지사였던 다구치 데이키를 압박해 부당한 수탈에 대항했다. 빗창은 전복 채취에 사용하는 도구다. 물속에서 빨리 전복을 떼어내려고 쓰는 날카로운 빗창이 무기가 되어 해녀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저항의 의미를 깨달은 소녀들에게 다가온 해방은 그들이 바라던 세상이 아니었다. 미군정의 수탈은 일제보다 심했고 무엇보다 일제 부역자들을 권력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소녀들을 고문했던 친일경찰은 미군정 경찰이 되어 주민들에게 총질을 일삼는다. 제주의 사람들은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 폭압에 저항하기로 한다. 반공의 이름아래 모든 반대 세력을 몰아세운 이승만과 미군정은 이남에서 유일하게 단독선거를 무효화한 이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평화적인 해결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서북청년회가 투입되고 나카무라 사다오(한국명: 송요찬) 상사가 토벌 사령관으로 제주에 내려온다. ‘1948년 10월 17일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다.



4‧3의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4월에 제주 모든 집이 제사를 지낸다는 말이 있다. 2만 5천명에서 3만명으로 추산되는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희생자의 정확한 수가 파악되지도 않은 상태다. 사건에 대한 국가차원의 진상 규명이 시작된 것이 2003년이다. 50년이 넘어서 말이다. 그 시간을 제주 사람들은, 그 희생자 가족들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제주4‧3은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오랫동안 철저하게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에게 4‧3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역사이다. 생존자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숨죽여 살아야 했던 일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작품해설 中 p.243


다카키 마사오(한국명: 박정희)가 두려웠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그렇게 4‧3을 숨기고 싶었던 걸까.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제주 토벌대와 같은 사고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5‧16의 주역들에겐 독립운동도 민주주의도 모두 좌익사상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일제의 군인들이었고 어떻게든 4‧3의 학살과 관련돼 있었다. 그들은 권력을 잡은 방법 그대로 자신들의 치부를 은폐했다.



바라던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중년이 된 세 소녀는 동네 주민의 손에 또는 군경의 총알에 희생당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아이가 있다. 토벌대에 속아 마을 사람들을 살리려고 굴욕을 무릎 쓴 련화의 딸이다. 동네 주민 전체가 학살당한 피구덩이에서 살아남은 아이의 이름은 민주다. 련화와 친구들이 바라던 세상, 일제를 물리치면 오리라 기대했고, 자주통일을 이뤄야만 올 것이라 믿었던 세상의 이름, 민주주의다. 련화의 딸 민주가 모두의 희생 속에 살아남는 장면이 작가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폭력과 존엄 사이』(은유, 오월의 봄, 2016)에 나왔던 4‧3피해자 김평강에 관한 기록이 생각났다. ‘젊은 사람은 있으면 다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살기위해 일본으로 도망갔던 그는 돌아온 후 ‘간첩’으로 몰렸다. 검사는 ‘모든 것이 애매’하지만 사형에 처하라고 구형하고 김평강은 7년여를 복역한다. 다른 간첩 사건 피해자와 김평강은 그가 살던 공동체에서의 평가였다. 김평강은 복역 후에도 마을에서 차별받지 않고 살았다. 구명을 위한 아내의 끈질긴 노력도 있었지만 4‧3에 대한 제주 사람들의 기억이 그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나니 아름답게만 기억됐던 제주의 색이 다르게 느껴졌다. 청명한 하늘과 잦은 바람이 모두 젖은 빛깔이 됐다. 돌무더기를 둥그렇게 쌓은 해녀들의 휴식터를 보면서 생각했던 물질과 물질 사이의 담소는 고통스런 울음소리가 됐다. 관광지로서만 인식하던 제주를 4‧3의 기억으로 다시 봐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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