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 서양철학사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부터 니체와 러셀까지
프랭크 틸리 지음, 김기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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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교과서로 사용되었’다기에 읽어볼 용기를 냈다. 의문이 생겼다. 824페이지의 책을, 그것도 읽기 어려워하는 철학사 분야를 왜 굳이 없는 용기와 시간을 끌어 모아가며 읽으려는 걸까. 벽돌 같은 책과 며칠을(사실은 약 2주간을) 씨름하며 깨달았다. 내겐 인간 존재가 어떻게 ‘생각’이란 것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음을. 과거 어느 순간 움튼 생각들의 씨앗이 어떻게 이어왔고 얼마나 다양한 사고의 방법을 모색해왔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또 지금의 내 생각은 사고의 지도 중 어느 지점쯤에 위치하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정리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거다. 그 한 번쯤의 시간이 『틸리 서양철학사』와 함께 왔다.


이 책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미국 각 대학의 철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교과서로 사용되었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내용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인정받으며 꾸준히 사랑받았다. 책 날개 저자 소개 中


부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부터 니체와 러셀까지’로 알 수 있듯이 『틸리 서양철학사』는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1900년대 중반까지의 서양철학의 흐름을 다룬 책이다. 인간 사유 역사의 거의 대부분을 아우르고 있다. 철학사 분야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이라면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러셀의 책은 분량이 약간 더 많고(1,056페이지), 다루는 시대가 『틸리 서양철학사』보다 조금 앞쪽에서 끝난다. 러셀은 자신의 전공이었던 분석철학까지를 다루고 틸리는 러셀 이후의 실증주의까지를 다룬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러셀은 철학사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자신의 논평을 상당부분 제시했다. 즉 “내가 보기에는”, “내 생각에는”과 같은 문장이 많다. 반면 프랭크 틸리의 책은 철학자들의 주장을 요약, 정리해 서술해 제시한다. 철학사에 대한 개략적인 지식과 맥락을 가지고 있다면 러셀의 책을 보면서 자신의 의견과 견주어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객관적으로 서술된 틸리의 책을 먼저 보면서 사상사의 지도를 그린 후 러셀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주관적인 견해가 크게 부각된 책을 읽고 자기 생각을 가지기 위해선 내 생각의 바탕을 먼저 준비해야겠기 때문이다.




저자는 철학사가 ‘철학 이론의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과 설명이 아니라’고 말한다. 각각의 이론들간의 상호 관계, 그 철학이 유래한 시대적 상황과 함께 이론을 정립한 사상가 개인에 대한 연구의 종합이라고 설명한다. 철학 이론을 알기 위해선 시대와 사회와 사람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많은 학문 분야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특히 생각의 역사를 연구하는 ‘철학사’에선 각별히 주의해야할 전제이다.


철학사는 각각의 세계관을 그 고유한 상황에 놓고, 그것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지적‧정치적‧도덕적‧사회적‧종교적 요소와 연결지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인간의 사색의 역사에 나타나는 발전의 궤적을 추적하고, 철학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자세가 어떻게 등장하며, 제공된 상이한 문제와 해결책이 어떻게 새로운 물음과 대답을 자극하는지를 보여주며, 각 단계에서 어떤 진보가 이루어졌는지를 규정해야 한다. p.17


틸리는 철학사를 서술함에 있어 ‘저자가 자신의 사상을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철학사 자체가 ‘자신의 최고 비판자’이므로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오류와 모순’이 드러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자신의 비판을 자제하고 ‘직전과 직후의 체계와의 비교’와 ‘그 선례와 결과’ 그리고 ‘그것이 펼치는 발전상’을 그 철학의 ‘목표와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는 저자의 이러한 철학사 저술의 기준이 잘 구현되어 있다. 각 철학 사상을 소개할 때마다 해당 철학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그 철학의 주요한 물음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이어 철학자의 사상을 요약 정리한 후 그 철학의 가치와 역사적 의의 등을 서술하고 있다. 각 철학 사조의 내용만 읽어서는 알기 어려운 전후 철학 사조와 주고받은 영향 관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에 대한 평가와 소피스트의 의의를 예로 들어보자. 탈레스가 철학사에서 중요한 이유를 한 줄로 요약하면서 단락을 시작한다. 또 궤변론자라는 소피스트의 별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명쾌하게 제시한 후 그들이 사상사에 미친 영향을 서술한다.


탈레스의 중요성은 철학적 물음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신화적 존재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 물음에 답했다는 데 있다. p.42


몇몇 후기 소피스트들의 허무주의적 가르침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적대적인 비판 때문에, 사상사에서 소피스트 운동의 중요성은 오랫동안 잘못 판단되었다. 헤겔과 그로트(Grote)가 이 사상가들에 대하여 공정한 평가를 내리려고 시도한 이후에야, 그들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이 이루어졌다. 그들의 가르침에는 선한 것도 있었고 악한 것도 있었다. p.89


탈레스가 신화에서 자연의 세계로 생각의 눈을 돌렸고 소크라테스는 인간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중세에 이르러 사고의 중심은 다시 신 중심으로 돌아갔고 르네상스에 인본주의가 도래했다. 근대의 철학자들은 비록 신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사고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켰다. 그 모든 생각의 갈래들을 정리한 책이 놀랍다. 글자만 읽기에도 벅차다.


저자가 펼쳐놓은 사상의 가닥들을 더듬더듬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따라갔다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앞에 서술한 대목을 후대 학자가 언급하면 또다시 생소했다. 철학자 아도르노가 말했다. “쉽게 요약될 수 있다면 철학이 아니다.”라고. 철학 읽기의 어려움에 대한 위로의 말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간략하게 요약한 책만 읽어서는 그 생각들을 다 따라잡기 어렵다. 배경 지식이 될 책들을 어느 정도 읽은 그리스 로마 시기의 철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중세와 근대 철학에 대한 독서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보니 어렵기 그지없었다. 현대 철학은 말 할 것도 없고.


『틸리 서양철학사』는 1998년 『표준서양철학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던 책의 2판이다. 과감하게 표준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서양철학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 책으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철학사라는 윤곽을 대략 맛보았다. 이후의 보완 독서가 얼마나 충실한가에 따라 철학사는 내게 선명하게 또는 흐릿하게 남을 것이다. 숙제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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