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인 서울 사계절 1318 문고 122
한정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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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가 빠진 변신으로 시작해 로맨스 없는 블랙홀로 끝나는, 시험 날 벌어진 한바탕 소동


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한 마리의 벌레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프카 「변신」)


어느 날 아침, 불안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반희는 자신이 손바닥만 한 토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정영 「변신 인 서울」 p.8)

한정영 장편소설 「변신 인 서울」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을 패러디했다고 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외판원에서 벌레가 된 주인공은 한정영의 「변신 인 서울」에서는 고등학생에서 토끼가 된다.


주인공 반희는 토끼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 참고서를 찢고 침대에서 팡팡 뛰고 난장판을 만든다. 영어단어, 수학공식, 문학지문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도 상관없다. 왜냐면 꿈이니까. 반희는 날아오를 것 같이 신난다. 10분만 5분만 더,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

그런데 휴대전화 진동이 좋은 기분을 방해한다. 신차미와 조민규가 보낸 메시지는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한 달 정도의 기억이 통째로 떠오르지 않는다.

순간, 반희는 시험 기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야겠다고 생각지만 꿈이 끝나지 않는다. 반희는 이번 시험에서 1등을 회복하지 못 하면 아빠에게 폭행을 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오싹해진다.

방문이 열리자 반희는 꿈에서 깰 거라 생각하지만 토끼인 상태로 가족과 대면한다. 아빠는 반희가 가출했다며 찾아내어 혼내려고 벼른다. 엄마는 반희가 공부를 못 하게 될 것을 걱정한다. 누나 반지는 반희가 죽인 토끼가 돌아왔다며 반희를 반긴다.

신차미와 조민규가 보낸 메시지와 조금씩 떠오르는 기억을 맞추어갈수록 반희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한 행동을 마주하게 된다. 아빠와 엄마,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이 알려질까 두려워했다는 것도 깨닫는다.

반희는 토끼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네가 1등을 하는 게 너만의 문제인 줄 알아? 아빠의 명예고 엄마의 체면이고 우리 가족의 자존심 같은 거야! (p.122)

그 물건은 이제 쓸모가 없어. (p.126)

털도 다 빠진 토끼를 어떻게······. 창피하잖아. 난 하얀 토끼를 원했다고! 넌 쓸모가 없었어. (p.140)

반희는 키우던 토끼가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방치하여 죽인다. 아빠와 엄마에게 반희는 1등을 해야 쓸모 있는 존재다. 그래서 토끼가 된 반희는 물건으로 여겨진다.

한정영 장편소설 「변신 인 서울」은 ‘생명은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가? 생명은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는가?’란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쓸모를 잃은 생명이 버려지는 과정을 당연한 듯 보여준다.


누군가가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거야. 틀림없이. 용기를 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이 꿈에서 깨어날 거야. 맞아. 용서를 받으면, 이 벌도 끝날 거야. (p.165)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인간이 벌레로 변신하는 상황은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이끌어내는 설정이다. 반면 한정영 장편소설 「변신 인 서울」에서 토끼로 변신하는 설정은 벌로써의 성격이 강하다. 주인공 반희가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부정적 인물이고 이야기는 반희가 한 행동을 밝히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반희가 꿈에서 깨려는 목적으로 용서를 받으려하기 때문에 반희의 사과도 정당함을 잃고 수단이 되어버린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카프카는 빠지고 변신만 남은 느낌이다.

읽다보니 어느 순간 ‘사랑은 블랙홀’이라는 오래된 로맨스 코미디 영화가 생각났다. 로맨스는 빠지고 블랙홀만 남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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