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이단자들 - 서양근대철학의 경이롭고 위험한 탄생
스티븐 내들러 지음, 벤 내들러 그림, 이혁주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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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나는 철학이 어렵다. 본격적인 철학서도 아닌 해설서도, 심지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쉬운 입문서도 일정 페이지를 넘어가면 어렵다. 기억력 문제일까, 논리적 사고의 결여 때문일까, 혹은 공부가 부족한 걸까. 읽기 힘들어하는 분야임에도 꾸준한 호기심은 또 어쩐 일인지. 계속 읽다보면 뭔가 조금은 이해 비슷한 지점에 닿을까 하는 기대가 있는 모양이다.


스티븐 내들러 부자의『철학의 이단자들』에 기대를 건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이다. 철학을 만화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림은 뭔가를 이해하거나 기억할 때 도움이 된다. 이해하기 힘든 논리도 그림으로 풀어놓으면 문장으로 된 것보다 더 알기 쉽지 않을까. 게다가 학습만화처럼 해설은 해설 따로 그림 따로 놀지도 않았다. "서양근대철학의 경이롭고 위험한 탄생"을 다뤘다고 하니 이참에 17세기 철학의 흐름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과학혁명의 세기'라 불리는 17세기는 또한 '천재들의 세기'로도 불린다. 과학과 철학 양쪽에서 근대를 여는 다양한 혁신이 튀어나온 시기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 베이컨, 데카르트, 홉스, 보일, 스피노자, 로크, 라이프니츠, 뉴턴과 같은 천재들은 과학에서 또는 철학에서 그리고 과학과 철학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근대적인 형이상학과 인식론이 등장했고, 자연에 대한 이해가 혁명적으로 진보했으며, 시민과 국가 간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델이 제시되었던 세기였기 때문이다. p.6

저자는 17세기의 당시의 '관습적 진리'를 반박한 천재들을 '이단자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저작은 실제로 '이런저런 교단들'에서 금서가 되기 일쑤였다. 근대에 가까운 이때까지도 종교집단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17세기 초만해도 브루노는 화형을 당하고 갈릴레오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했다. 그러나 종교의 부조리한 아성도 이단자들의 합리적 지성이 쌓이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실제로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 모두가 바티칸 금서 목록에 오른 저작을 가지고 있다. 브루노, 갈릴레오, 베이컨, 데카르트, 홉스, 파스칼, 스피노자, 아르노, 말브랑슈, 보일, 로크, 라이프니츠, 뉴턴의 저작 모두 그 악명 높은 리스트에 올라 있다. 중세와 근대 초기의 종교 당국은 때로 종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사유와 이단을 식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p.7


1600년 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 조르다노 브루노가 무려 화형을 당한다. 이어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처벌을 받고 같은 주장을 담은 책을 썼던 데카르트는 책 출판을 포기한다. 고대의 권위에 눌리지 않는 지적인 탐구에 의한 과학을 추구하는 학자는 점점 늘어간다. 책에는 철학자 간의 조우를 통해 그들의 사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데카르트는 프랜시스 베이턴의 책을 읽으며 둘 사이의 사상적 공통점을 확인한다. 또 아파서 누워있던 파스칼을 데카르트가 찾아서 논쟁을 벌이며 생각의 차이를 알게 된다. 프리드리히 5세의 딸 엘리자베스 공주와 데카르트는 서신을 통해 사상을 주고받는다.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홉스는 스피노자의 저술에 '눈이 튀어나오게' 놀라고, 이런 대담한 저술가를 라이프니츠가 직접 찾아가서 만난다. 유럽 대륙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생각이 싹트는 가운데 서로의 사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교류했다.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반목하면서.


1600년에서 시작한 책은 시간 순서대로 각 사상가의 철학을 다루면서 1703년 런던의 뉴턴을 지나 1755년 제네바의 볼테르에 이른다. 17세기의 철학 흐름을 정리하면서 그는 철학자들의 주장이 각기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누군가의 주장이 후에 옳은 것으로 밝혀진다고 해서 반대 주장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진보를 중단시키려고 했던' 종교세력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볼테르는 다른 사고에 대한 존중, 무조건적인 박해를 막을 수 있는 인간 이성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공들여 만든 책이다. 글을 쓴 스티븐 내들러는 위스콘신 대 철학과 교수로 17세기 유럽 철학자를 연구해왔고 특히 스피노자 연구의 권위자다. 그린이 벤 내들러는 글쓴이의 아들이다. 책이 다루는 내용이 철학이기 때문에 그림과 글의 긴밀한 조화를 생각하면 (그들 사이가 좋다는 전제하에) 저자들이 가족이라는 사실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옮긴이 또한 스피노자를 전공하고 서양근대철학을 강의하는 분이니 오역의 위험도 줄었을 것이다. 워낙 이해도가 낮은 분야이다 보니 오역인 줄 모르고 문맥을 오해한 채 지나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그런 면에서 세심한 편이었다. '옯긴이의 말'에서도 적시하고 있는바 "최대한 풀어 쉽게 번역"했고 "부연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는" 역주가 달려있다. 전공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옮긴이는 이 책이 "'초심자'를 위한 만화'라고, "철학에 익숙한 독자들도 재미를 느낄 법"하다고 했다. 그러나 철학에 익숙하지 않는 독자와 완전 초심자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는 책이다. 옮긴이처럼 이 책을 두고 아들과 대화하려면 한 번 읽는 걸로는 안 될 듯하다. 만화라고 만만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림으로 설명돼 있다고 해서 몇 페이지에 압축된 사상들이 단번에 이해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17세기의 철학자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일별했다는 소득이 있었다. 수차례 읽고 그림이 설명하는 바와 문장을 연결해서 떠올릴 수 있어야 그림과 글이 함께 들어간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습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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