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웃음의 나라 -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
정병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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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사실은 국민 학교 시절,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겪은 적이 있다. 짧게 말하자면 북한 사람들이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었다. 북한 땅에 사람이 사는 일이 당연할진대 왜 그렇게 놀라게 되었는가가 이 에피소드의 관전 포인트. 바로 <똘이장군> 때문이다. 어린 시절 TV만화영화에 꽤나 심취했던지 나의 무의식 속 북한은 사람이 아닌 동물이 살고 있는 나라였다. 그것도 아주 포악한 돼지와 늑대가 점령한 나라였다. 그렇다고 내가 지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방송에서 처음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 "북한 주민은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당연한 사실에 놀랐다. 내 머릿속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똘이장군>이라는 인기 반공물을 반복 시청한 나는 어느샌가 북쪽땅의 주민들에 대한 심각한 무의식적 편견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북한 문제를 생각할 때 언제나 떠오르는 웃픈 이야기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통일의 길을 가려면 서로를 알아야 한다는 논리는 자명하다. 그러나 이 명징한 논리를 체화하기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장년세대는 나의 경우처럼 무의식에 내재된 편견이 깊을 수 있고, 청년세대는 그리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보이지 않는 편견을 깨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고 불안한 앞날을 제쳐두고 먼 날의 일을 준비하자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는 북한 문제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시야를 넓혀가려면 책부터 읽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정병호 교수의 『고난과 웃음의 나라』는 현 시점의 북한에 대해 무겁지 않게 다룬 책이다.



표지부터 이야기 하고 싶다. 북한을 대표하는 상징물들을 앙증맞게 모아놓았다. 여명이 밝은 것인지 노을이 지려는 것인지 지평선이 발그레한 가운데 금수산 궁전, 김일성 동상, 개선문, 류경호텔(이 책을 일고 이런 훌륭한? 건축물의 존재를 알게 됐다.) 등이 옹기종기 반짝거리고 있다. 그런데 가장 오른 쪽 끝에 장난감인 것처럼 황금색의 미사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북한을 말할 때 반드시 이야기해야 할 것에는 미사일에 대한 주제가 포함돼 있어야 한다고 당당히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거대한 건축물과 조형물 그리고 미사일로 상징되는 나라, 우리의 북쪽 형제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긴 책다운 표지다.


저자는 90년대 후반 북한의 대기근 시절 구호활동가로 방북을 시작했다. 기아에 스러져가는 아이들을 지원하고자 했던 일은 이후 탈북민을 위한 일들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모습을 가까이 접할 기회들이 있었고 문화인류학자의 시선으로 북한과 북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문화인류학은 문화의 상대성을 기본으로 한다. 어느 한 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고 편견을 거둔 시선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학문이다. 저자도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북한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한계를 넘어서 같은 사람으로 그들을 대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이 책이다. 때문에 책에는 북한의 실상에 대한 단순한 나열이나, 판단의 시선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그들은 그랬고 우리도 그런 적이 있다"는 식의 서술이 자주 등장한다.


북한사회의 '민주화'는 절실한 과제다. '자주 주권'의 상징으로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어 체제 안보와 권력세습은 가능했지만 그러는 동안 세계적 빈곤국이 되었다.…… 변화의 물꼬를 열려면 우선 북한사회를 강박적 위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국제적 고립사태가 완화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쟁종료와 공식수교, 남북교류협력은 중요하다. p.360


남한사회의 '인간화'도 시급한 과제다. 탈북민들의 경험은 이 문제의 단면을 새롭게 보여준다.…… 탈북민들을 지원한다고 모두 예산 타령만 하는데 사실 돈보다 사람이 더 아쉽다고 했다. 외롭고 불안하고 무엇보다도 희망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알고 보니 남한 사람들도 모두 그리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인간관계는 사라지고 이해관계만 남은 이 사회가 바로 남한 청년들이 이야기하는 "헬조선"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pp.360-361


학자로서의 자세도 잃지 않았다. 쉽게 방문할 수 없는 지역이나 시설을 관찰할 기회를 만나면 "사진도 못 찍고 녹음도 못 할 상황"이라도 "가능한 자연스럽게 보고 기억하려 노력했다." 자신의 의견에 배치되는 주장도 한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경험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바로 이런 상황이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가치관과 사회조직 원리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p.126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북한의 변화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살아온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어떤 가치관과 규범, 생활방식을 체득하고 내면화했는지"를 밝히고 싶었다고 한다. 자신이 "문화인류학자로서, 또 구호활동가이자 교육자"로서 체득한 북한에 대해 나누고 싶었다는 말이다. 책을 읽고 나니 북한을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살아 있는 존재로 한층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로 느껴진다. 『고난과 웃음의 나라』는 저자의 의도를 채우고도 남을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분단이 만든 문화적 이질성은 쉽게 지워지리라 낙관한다. 한민족으로서의 문화적 동질성을 재확인하고 회복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의 동질성은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너무 달라진 남쪽의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북쪽의 그들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작업이 우선 필요하다. p.15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을 만날 때는 서로 살아온 삶의 경험에 대한 존중과 공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에서 상대방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눈을 통해서 그가 본 세상과 걸어온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우리도 서로 '가지 않은 길'에서 겪은 삶의 경험을 나누고 공감하며 오랜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존을 모색하게 되길 바란다. p.362


2001년 대학생들과 함께 중국 기행을 했었다. 책에 나오는 것처럼 단둥의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타면 맞은 편 북한 지역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 그때 우리 일행은 북쪽 사람들을 마주한다는 신기함에 강 건너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고 손을 흔들었다. 거리가 있어 표정을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그쪽 사람들은 움직임 없이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높이 처든 손이 머쓱해진 우리는 이후 조용히 유람선 관광을 마쳤다. 우리는, 아니 나는 그 때가 대기근의 후유증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시기라는 걸 몰랐다. 그저 "엄혹한 체체에서 사니 저렇게 무뚝뚝한 모양이다"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북한에 대해 좀 더 알았다면, 또 그때 강변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았다면 그렇게 천진난만하지 못했을 것 같다. 유람선을 타고 북한 지역을 '구경'하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을 거다. 앎이 필요하다.


저자의 관찰, 분석과 해설 덕에 북한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교육 기관마다 반드시 있다는 세 성인(누굴까?)을 모신 신비로운 '교양실'의 존재, 김일성의 일생은 영웅 신화의 재해석이라면 김정일의 신격화는 예수 탄생설화의 모방이라는 사실, 북한은 6.25 전쟁이후 전쟁 고아들을 해외 교육기관에 유학시켜 돌봤다는 역사, 2016년 중국의 북한 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의 진실 등. 궁금하다면 문화인류학자가 경험한 북한문화에 대한 훌륭한 그리고 흥미진진한 현장기록에서 확인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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