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 댄서
조조 모예스 지음, 이정민 옮김 / 살림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강요나 통제 아래 수행하는 동작은……

대상이나 관계에 대한 이해없이 나온 행동이다.

그런 대우를 받는다면 말이든 사람이든 품위 있는 태도보다는

비열한 행동을 하기가 훨씬 쉽다.

—크세노폰, 『기마술』, p.355

 

기마술의 아버지, 크세노폰과 조우하다. 『페르시아 원정기』의 그리스 장군 크세노폰을 로맨스의 여왕 조조 모예스의 소설에서 다시 만났다. 1만 명의 병사와 함께 적진에 떨어진 장군, 동료와 부하와 함께 고향 그리스로 돌아가기 위한 처절한 진군기의 주인공이 설탕 냄새 그득한 로맨스에 등장하다니 아연할 일이었다. 소설 속 문장의 크세노폰이 정말 내가 아는 그리스 장군이 맞는지 한참이나 검색했다. 맞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원정기』 외에도 『소크라테스 회상록』, 『퀴로스의 교육』, 『헬레니카』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가 남긴 소품 중 『기마술』이 있었는데 조조 모예스는 이 작품을 그녀의 신작 『호스 댄서』의 모티브로 삼았다. 각 장의 시작 부분에 앞으로의 내용을 담은 크세노폰의 문장이 들어있다. 로맨스 소설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700페이지 가까운 분량에 아연했던 기분은 크세노폰의 문장과 함께 사라졌다.

 

 

이야기는 말을 사랑하는 소녀와 이혼 위기의 변호사 부부가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한 집에 살게 되면서 시작된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란 사라, 그나마 할머니는 몇 년전에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승마기수였던 할아버지 덕에 사라는 최고의 승마 교육을 받고 말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다. 할아버지는 사라에게 프랑스 최고 승마교육 기관에 입학할 기회를 주고 싶어 하지만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동이 어려워진다. 보호자가 없는 사라는 시설로 갈 처지에 놓인다.

 

영국 런던의 유능한 변호사 너태샤는 전남편 맥과 이혼 과정에 있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맥을 질투하면서도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너태샤는 회사 일에 몰두하면서 직장 상사와 친밀하게 지내게 된다. 이런 아내를 의심한 맥이 집을 나가고 둘은 함께 살던 집이 팔리면 헤어지기로 결정하지만 마음 한켠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아이에겐 보호와 도움이 필요하고, 부부에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 사라는 세상에 홀로 떨어진 채 자신의 꿈을 향해 나갈 수 있을까. 너태샤와 맥은 정말 이대로 헤어질 수 밖에 없는 걸까.

 

작가가 로맨스의 여왕이라고 불리고 내는 책 마다 그 어마머마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숨길 수 밖에 없는 사정을 가진 아이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한 부분에서 아이의 절박함이 잘 드러났다. 남편을 대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속내와 태연한 척 가장하는 너태샤의 행동을 묘사하는 대목도 절묘했다. 아이와 어른의 적나라한 속마음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능력도 작가적 재능일 것이다.

 

너태샤는 사라와 부대끼는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변호사로 남들보다 좋은 일을 하고 더 올바르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라의 문제도 또 자신의 문제도 그 일을 피하지 말고 직시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어른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난 확신을 가지고 일했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좋은 일을 하고 더 나은 한쪽에 있다고 자부하며 살았지.……” p.176

"그런 뜻이 아니라 내 말은, 그런 문제를 극복하는 게 어른이 할 일이라는 거지.“ p.322

 

사라는 자신의 말과 훈련하면서 배움에 대한 성찰을 얻은 아이다. 어떤 일에서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조금씩 애를 쓰는 과정, 그 일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특히 혼자 하는 일이 아닌 경우 상대와 함께 마음을 모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할아버지에게 배웠다. 그리고 그 과정에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됐다. 할아버지는 겉으로 보이기 위한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이해와 존중’이 더 중요하고 사소함 속에 사랑이 스며있음을 가르쳤던 것이다. 아이가 배운 사랑은 희소한 것 그래서 중한 것이었다.

"아저씨는 왜 계속 사진을 찍어요?“

(…)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지.”

(…)

“저도 늘 더 나은 동작을 하기 위해 애쓰는 거예요. 말과 나의 완벽한 소통이나 교감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요. 고삐를 잡는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압력의 정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니까요. 말의 기분이나 제 몸의 상태, 땅바닥의 조건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기술적인 문제가 전부가 아니거든요. 말과 나, 두 마음과 심장이…… 균형을 찾는 과정이기도 해요.” p.288

“……중요한 것은 동물의 감정을 어떻게 최대한 이끌어내어 활용하느냐는 점이야. 이는 사람이 말과 함께 힘을 합쳐 탁월함을 추구하는 과정이란다.……”

……

“……최선의 방법은 말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거지.……”

……

“그가 추구하는 것, 제안하는 것에는 분명히 사랑이 있어. 그는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소한 행동에도 사랑이 포함돼 있다고 봐야지.” pp.456-457

 

로맨스 소설의 모양새를 갖춘 소설 『호스 댄서』를 읽으면서 정작 교육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자신이 열정을 가진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원하는 일을 스스로 하게 할 때 최고가 된다는 문장들이 특별했다. 문장 자체는 어디서나 들어본 얘기지만 소설 속에서 사라가 실현해내는 감동적인 과정들이 각 문장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자기 일에 대한 사랑으로 이뤄낸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지.…… 어떤 사람을 자기 세상에서 밀어내버리고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어.” p.555

"말을 온당하게 이끌 수만 있다면 말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동작을 수행할 수 있어요. 닫혀 있는 문을 열어서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도록 하는 거예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원해서 하게 해야 하죠. 바로 그때 말은 최고가 되는 거예요." p.289

 

우리는 아이들을 어떤 존재로 대하고 있는가. 온당하게 대하면 스스로 원해서 자시의 능력을 무한히 드러낼 존재들을 틀에 박힌 편견 속에 가두고만 있는게 아닐까 싶다. 사라의 할아버지가 했듯이 우리도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며 손을 꼭 잡아줘야하는 걸 아닐까.

“가끔은……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구나. 부도 어리고…… 너도 어린데…….”

그러면서 사라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잘못을 인정할 때면 취하는 행동이자 마음의 표현이었다. pp.99-100

 

사라와 말 부셰가 가는 길을 따르다보니 어느새 687페이지를 넘긴다. 이야기에서 특별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아도 순식간에 읽히는 소설이다. 아이와 말만의 여정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너태샤와 맥이 자신들의 엉킨 매듭을 푸는 과정도 또한 매력적이다. 요즘처럼 억지로 집에 있어야하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지는 때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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