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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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없는 세계'를 제목으로 하는 소설은 정작 세계를 사랑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2019년 서점대상 본상을 수상한 소설 『사랑없는 세계』를 쓴 미우라 시온은 '문학성과 대중성을 함께 인정받는' 작가다. 대중소설 작가에게 가장 영예로운 상이라는 나오키 상을 2006년에 수상하고 '일본인이 사랑하는 소설가' TOP50에 선정되기도 했다. '유쾌하고 따스한 소설'이 인기의 비결이라는 평은 이번 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없는 세계』는 식물을 연구하는 박사과정 모토무라와 그녀를 해바라기하는 식당 종업원 후지마루의 이야기다.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풀어가는 중심 서사 주위로 모토무라의 연구실 동료들과 식당 엔푸쿠테이의 주변 인물들이 수묵화처럼 스며들어 있다. 일본 소설에서는 그 사회 특유의 분위기가 풍긴다.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거나 스릴러같은 장르소설이 아닌 보통에 가까운 사람이 삶을 다룬 경우 드러나는 분위기가 있다. 사람을 대하는데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 어딘가 허당기가 농후한 인물들, 자기 분야에 정통한 장인의 출연, 클라이막스에서 조차 격함을 배제한 담백함 같은 것들이다. 소설이 사회를 비추는 면이 있다면 적어도 소시민적 일본인의 일상은 이런 모습일까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정치적 입장은 배제한 의견이다.)

 

후지마루는 무림의 고수에 가까운 음식 솜씨를 지닌 쓰부라야가 운영하는 식당 엔푸쿠테이에 입주종업원으로 일하게 된다. 삼고초려(?) 한 덕분에 얻은 일자리이가도 하고 주인의 능력을 알아보고 선택한 터라 무척 열심히다. 식당 앞 대학의 한 연구실에 배달을 다니면서 박사과정의 모토무라에게 반한다. 남들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프린트가 인쇄된 티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입고 하찮아 보이는 풀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대학원생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돌아온 답은 정중한 거절. 모토무라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어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생장하는 식물 세계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식물을 바라보는 현미경 속 별처럼 빛나는 세계와 결혼한 것이다. 선뜻 공감하기 어려운 답을 받은 후지마루는 그럼에도 그녀를 이해하려 애를 쓴다. 계속 대화하며 그녀가 속한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배가 고프니까' '맛있고 예쁘니까'라는 기분은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한 중요한 욕구입니다. 기초연구도 같은 욕구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알고 싶다'는 마음은 공복감과 비슷해요. 아름다룬 것을 추구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기 때문에 연구하는 겁니다."

그런 기분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는 건 어렵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인간의 근원적 욕구라고 모토무라가 말하는 걸 들으니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연구를 통해서 누군가의 마음과 연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pp.161-162

 

모토무라가 생각은 식물에 경도되어 있다. 느낀대로 판단하는 식물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 세상은 오히려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식물과 결혼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도 없고, 기온이나 계절이라는 개념조차 없는데도, 식물은 정확히 봄을 알고 있다. 온도계나 일기장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건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가 아니라 진짜 봄이다. 슬슬 여느 해와 같이 활발하게 생명 활동을 할 시기가 왔다'라고 판단하고 기억하다.

반대로 인간은 뇌와 언어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고뇌도 기쁨도 모두 뇌가 내놓는 것이고, 그것에 휘둘리는 것은 물론 인간이기에 맛볼 수 있는 묘미겠지만, 관점을 바꿔놓고 보면 인간은 뇌의 포로라고 할 수도 있다. 실은 화분의 식물보다도 더 좁은 범위에서밖에 세계를 인식할 수 없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 p.352

 

모토무라가 살고 있는 '사랑없는 세상'은 사실 무엇보다도 큰 사랑을 공유하는 세계다. 무언가를 알고 싶은 마음, 열정과 인생을 바쳐서 연구하는 태도 자체가 사랑이라고 본다면 말이다. 또 빛으로 만든 몸을 다른 생물들에게 제공하고 서로의 먹이사슬이 되는 일, 그것은 사랑으로 연결된 세계인 것이다.

 

"그 열정을, 알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나요? 식물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모토무라 씨도, 이 교실에 있는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대상인 식물도, 모두 같아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살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가끔 생각해요. 식물은 광합성을 하며 살고, 동물은 그 식물을 먹고 살고, 그 동물을 먹고 사는 동물도 있고……. 결국, 지구상의 생물은 모두 빛을 먹고 살고 있구나 하고요." pp.457-458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은 식물의 세계를 알고 싶은 마음을 인정한다. 모토무라를 알고 싶은 마음이 커질 수록 식물의 신비를 알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후지마루는 자신이 '언젠가 다시 연애를 시작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별처럼 빛나는 현미경 속 모토무라의 세계가 의미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떤 존재에게 기울이는 마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익숙하지만 독특한 캐릭터가 촘촘히 등장하는 것도 이 소설이 재미다. 살인청부업자 분위기가 풍기는 지도교수, 전공분야인 덩이줄기만 건드리지 않으면 한없이 느긋한 옆 연구실 교수, 선인장 오타쿠 동료 연구자, 식당 종업원의 애정관계를 두고 진지한 토론을 일삼는 단골손님 등. 사람뿐 아니다. 모토무라의 연구대상인 '애기 장대'는 소설 전반에 자신의 유전자 구조를 밝히는 과정을 공개하고 후지마루의 집 건너편에 핀 무궁화조차 사랑에 대한 성찰의 조력자로 역할을 다한다.

 

혼자 책을 읽다가 '풋'하고 웃을 터뜨리게 되는 대목들이 있는 반면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무슨 소릴 하는 건이 혼란에 빠지는 부분이 있다. 식물학 박사과정 논문을 위한 가설, 연구 설계, 실험, 검증, 결론제시에 이어 연구의 한계와 앞으로의 연구 방향 설정 과정이 소설 내내 자세히 서술되기 때문이다. 식물의 유전자 연구를 위해 어떤 기구를 이용해 실험하고 결과를 기록하는지에 대한 부분도 상세하기 그지 없다. 일본식물학회에서 특별상을 괜히 준게 아니었다. 그러나 차분히 읽어가면 이해못할 정도는 아닌 것이 또한 작가의 능력이라고 하겠다. 연구자의 태도에 대한 단락 또한 인상적이다. 자기 분야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더 넓은 시야에서 연구의 근본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특정 학문 분야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넓은 시야가 요구될 겁니다. 연구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어떤 연구를 왜 하고 있는가, 그것에 의해 무엇을 알게 되었고 아직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알기 쉽게 전할 수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연구비가 나오지 않는 것도 않는 것이지만, 일반인들과 소통하지 않다 보면 '바로 결과가 나와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 이외에는 모두 소용없고 무의미하다'라는 나쁜 성과주의, 공지주의가 세상을 뒤덮어버릴 테니까요." p.160

 

생물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특히 식물학과 유전학에 관심이 있다면 남다른 독서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 『사랑없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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