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 밀레니얼 세대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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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다. 페이스북도 마찬가지. 소통에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다. 단지 그 소통 방식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해서 그 인터페이스를 사용해 주고받을 수 있는 내용에 의문이 들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마셜 맥루헌의 오래된 명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매체의 형식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미지가 주 컨텐츠를 이루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오가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아니 그 인터페이스로 주고 받기에 최적화된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면 커뮤니케이션의 메시지의 일부일까 혹은 전통적인 메시지를 초과할 것인가.

 

다른 의문도 있었다. 타인을 의식한 글에서 자기 전시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어디까지를 공유로 보고 어디까지를 과다 노출로 볼 것인가. 넘쳐나는 자발적인 개인의 노출을 보면서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개인들은 왜 자신의 사적 생활을 노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까. 이런 내용으로 지인과 대화한 적이 있다. 공개적으로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나의 입장에 지인은 어디까지를 전시라고 보느냐는 질문을 건넸다. 대답할 수 없었다. 여행기나 소소한 가정 생활에 대한 글을 종종 방송에 투고하는 지인에게는 ‘사생활의 전시’라는 단어가 불편했을 것이다. 당시엔 그저 얼버무리고 넘어갔지만 사실 최근까지 지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정지우 저자의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는 SNS 세상에 대한 질문에 정답지처럼 보인다. 저자 정지우는 ‘분노’라는 키워드로 우리 사회를 분석한 『분노사회』와 삶을 견디는 고전읽기 『고전에 기대는 시간』등의 인문적 성찰을 담아낸 다수의 책을 펴냈다. 또한 팟캐스트 <정지우의 인문학적 순간>과 <뼈가 있는 책>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제된 목소리로 전한 바 있다. 이번 책에서는 저자가 청년세대라 정의한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부 환각세대: 우리가 원하는 것은’에서 저자는 ‘꿈’에 대한 강박과 ‘현실’에 대한 불안 사이에서 괴리를 겪는 자신의 세대를 ‘환각세대’로 규정한다. 밀레니얼 세대는 ‘최악의 양극화에 시달리는 시대의 청년들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지극히 평준화된 이미지를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은 ‘환각적인’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고 거기서 멀어질 때 박탈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소외감을 선사’하는 그 이미지에 의존하는 반면 그것을 따라잡지 못함에 좌절한다.

 

청년 세대를 절망하게 하는 이미지는 ‘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된다. 어두운 현실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인스타그램에는 그늘이 없다. 저자는 ‘이미지와 실제 삶의 간극이 일상화되면서 어쩌면 절망과 우울, 분노가 더 극적이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밝고 환하기만한 일상의 단 ‘한 순간’을 마치 삶 전체인 것처럼 인식하면서 청년세대의 삶은 팍팍해져만 간다. ‘삶과 이미지의 간극’을 알아보고 그 격차를 넘어서고자 고민이 필요하다.

 

저자는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긍정한다.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에 가린 시각에 비친 사회보다는 청년세대가 사회를 진단하는 통찰이 예리하다고 말한다. 윗세대에겐 이미 살아버린 시간이지만 청년들에게는 예정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앞으로 살아낼 사회에 대한 청년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저자의 말대로 이들에게 얼마나 믿음을 갖고 귀를 기울이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청년의 문제가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시대 전체, 이 사회 전체에 대한 통찰이나 시야는 이미 기성에 진입한 존재들보다는 기성에 진입하기 이전의 존재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

사회 전체, 시대 전체, 이 세상 자체에 대해 ‘발언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는 사실 이미 이해관계에 얽혀들어 있으며, 그들의 하루하루를 지배하는 세상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고, 결국 이미 속하게 된 자신의 삶 안쪽을 향하는 시야 밖에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삶 앞에 선 청년, 자신들이 시작하게 될 삶의 조건을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응시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그 누구보다 절박하게 시대 전체와 미래 전체를 마주하고 있는 청년들의 시야는 항해에 앞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항해사의 눈빛처럼 예리하고 투명하다. p.79

 

그런데 사실 양쪽에게 사회 문제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그것은 자기가 믿는 사회의 정의이자 자기 정체성, 신념과 존재의 문제라면, 청년세대에게는 자기의 생존이자 사다리의 문제이고, 게임의 룰이 공정한지의 문제인 것이다. p.99

 

결국 우리 모두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리되어 보이는 문제들 또한 넓은 차원에서는 이어져 있고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인식에 계속해서 도달해야 한다. p.114

 

‘2부. 젠더에 대하여: 여성에 관해 덜 말해질 때란 결코 오지 않았다’는 페미니즘 이슈를 다룬다. 남성 저자, 특히 청년 세대의 남성이 말하는 젠더에 대한 시각이 새로웠다. 흔히 젊은 남성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리며 젠더에 대해 또는 페미니즘에 대해 거의 반감에 가까운 감정을 가진다고 여겨진다. 인류 역사 내내 지속됐던 가부장 문화에 기초한 정체성의 문제를 인식하려 하지 않고 전엔 가지고 있었다고 믿었으나 이제는 빼앗긴 것같은 권리에 집착하는 것이다.

 

최근 청년 남성의 분노는 ‘공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젊은 남성들이 화가 나는 이유는 ‘남성과 여성의 경쟁’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문제의 근본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뿌리는 가부장적인 문화구조다. 그 속에서 형성되고 강요받는 정체성이다. p.150

 

젠더 문제에 대한 저자의 제안은 ‘이해’다. ‘혐오와 매도’를 내세우기 전에 ‘끊임없이’ 이해하라고 주문한다. 젠더에 대한 논의는 기성세대에게는 체념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일깨운 인류 절반의 인식은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남성성’에 대한 뿌리깊은 믿음도 쉽게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청년세대는 젠더문제의 해결을 향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자의 제안이 유효하다. 적대적 인식보다는 ‘이해’를 전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혐오와 매도 그리고 몰이해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끊임없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하기 싫어서 이해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어떤 잘못의 대가를 치른다면, 그것은 이해하지 않은 일의 대가가 될 것이다. 이해하지 않은 일, 손쉽게 증오한 일, 속 편하게 이해를 포기하고 혐오를 택한 일에 대한 결과는 그리 우습거나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p.151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 ‘3부. 개인과 공동체: 우리는 서로 뒤섞이는 바다’에 이르러 인스타그램의 사생활 노출에 대한 질문의 답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었다. 책 전반에 걸친 청년세대에 대한 분석은 그들과 SNS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했다. 청년세대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그 문제점, 기성세대와의 차이 등을 알 수 있었다. 청년세대와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선 ‘이해할 수 없음’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이해를 거부’하지 않되 어떤 점을 ‘용납’하기 어려운지를 이야기해야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상호 이해’를 위한 전제가 마련될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이해 자체를 거부하는 형식의 담론은 결코 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런 점에서는 이해가 가능하되 이런 점에서 용납해서는 안 된다’라는 식의 언술 행위가 자리 잡을 필요가 있다. p.284

 

저자 스스로는 자신이 청년세대를 지나쳤다고 말하지만 독자에게 그는 누구보다 청년세대를 대표한다. 우리 사회에서 청년세대와 기성세대가 이 책에서 다룬 주제들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싶다. 청년세대에게 귀기울여야 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책을 읽듯이 곰곰이 듣고 있을 수 있을까. ‘이해’하기 위해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청년세대에게 이 책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핍진하게 다뤘다고 여겨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성세대로서는 그들에게 귀 기울여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러한 ‘귀기울임’이 언젠가 ‘이해’에 가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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