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 (완역판) - 그리스도 이야기 현대지성 클래식 10
루 월리스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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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벽돌을 쌓아 만든 듯 한 영문이미지가 떠오른다. 이어 전차에 올라탄 필사적인 표정의 배우 찰턴 헤스턴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너무도 유명한 영화 <벤허>를 대표하는 인상들이다. 1959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본 기억은 없다. 전차 경주 장면 일부와 병에 걸린 두 여자가 신비로운 치유를 경험하는 장면 정도가 생각날 뿐이다. 아마도 <주말의 명화>를 시청하던 시절의 기억이 아닐까 싶다. 60년 전 영화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2016년 최신의 그래픽 기술을 동원한 리메이크작은 이전 영화 흥행과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성적을 냈다. 액션물로 기억된 이 영화의 원작 소설 제목에 ‘그리스도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렸다는 것을 안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영화 <벤허>를 말할 때 전차 경주 장면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루 월리스의 『벤허』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제외한다면 의미가 없는 소설이다. 현대지성의 완역본으로 만난 소설은 영화 영상으로 다 담아내지 못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동방박사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진실한 의미를 설명하고 그것이 세속적인 구원과 얼마나 다른지를 역설한다. 아마도 저자는 자신이 알게 된 그리스도교의 참의미를 소설이라는 외피 속에 담아 독자에게 가깝게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월리스 자신은 (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를 부인하며 자신은 무신론자라기보다는 기독교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고 무지했으며 벤허를 쓰기 전에는 성지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벤허』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당시 미국에서 유명한 불가지론자였던 로버트 잉거솔 대령과의 만남이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 아내와 가족들과 늘 교회에 나가기는 했어도 정작 기독교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데에 충격을 받은 월리스는 그 일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해 공부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벤허』였다. p.809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대인 유다 벤허다. 유복한 집안의 자손이었지만 로마인 친구 메살라의 모함으로 갤리선 노잡이 노예로 전락한다. 자신과 가족의 망가진 삶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벤허의 서사는 동방박사와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겹쳐진다. 힘을 기른 벤허는 자신의 복수와 더불어 로마의 압제에 맞서 유대인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그들에게 온 ‘유대의 왕’을 앞세우고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울 준비를 한다.

 

정치적인 왕으로서 유대인들의 왕이 될 메시아는 그들의 도움으로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할 것이며, 유대인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원히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바리새파, 또는 정치적으로 말하면 분리주의자들은 성전과 회랑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꿈보다도 훨씬 원대한 희망을 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꿈은 이 세상을 정복하는데 그쳤지만 그들의 꿈은 땅은 물론 하늘까지 뻗었다. 말하자면 대담하게도 그들의 불경스러운 이기심은 멈출 줄을 모르고 전능한 하나님마저 사실상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부려 먹으려고까지 들었다. p388

 

‘유대의 왕’ 그리스도는 벤허를 비롯한 유대인의 생각대로 유대인의 구원만을 위해 온 존재였을까. 저자는 이집트 출신 동방박사 발타사르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와 구원의 의미를 밝힌다.

 

구원은 정치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네. 통치자와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려봤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게 될 뿐이니. … 오시게 될 그분은 영혼을 구원하시게 될 것이라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이 땅에 오시어 정의를 세우심을 의미한다네. p.399

 

벤허와 유대 민족이 그린 이상은 세속적 구원 즉 정치적 구원이었다. 로마인과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하고 유대인의 자유를 되찾는 일 말이다. 유대인의 나라를 세워 자신들을 구원한 자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왕국이 원하는 전부였다. 그러나 메시아로서 지상에 온 그리스도의 구원을 모든 사람의 영적 구원이었다. 특정한 일부를 위한 구원이 아닌 전 인류를 세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일이었다. 유대 민족은 자신들의 왕국 이상의 것은 꿈꿔 보지도 않았고 그러므로 원할 수가 없었다. 꿈꿔보지 못한 삶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아무리 메시아의 축복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삶에 스미지 못했다.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결과들은 저절로 예정된 것이고, 저절로 예정된 것들은 모두 깨어 있는 꿈속에서 만들어진다. … 우리가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노동 자체 때문이 아니라 꿈꿀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꿈은 늘 단조로운 일상에 들어 있어서 듣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사는 것은 곧 꿈꾸는 것이다. 오로지 죽어 무덤에 묻힌 후에야 꿈이 사라진다. p.596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한다. 자신과 민족을 구할 왕이 속수무책으로 스러진 후 벤허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지하교회를 건설해 교세를 모으는데 힘을 쏟는다.

 

그 말과 태도와 소박한 기도에 벤허는 새로운 느낌의 감동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실제적이고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 그것도 단지 유대인만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이방인마저 다 사랑하는 아버지시다. 중간에 중재자가 전혀 필요없는, … 온 우주의 아버지시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왕 대신 구원자를 보내 주실 것이라는 견해는 벤허에게 빛처럼 새롭게 다가왔을 뿐더러 너무도 명백해서 그러한 것이 더 큰 선물이며 하나님의 본성에 훨씬 더 들어맞는다고 생각되었다. p.651

 

소설 『벤허』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벤허라는 인물이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책이 전달하는 종교적 의미를 하나의 종교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인간적인 기준을 내세우며 행하지 않은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메시지는 모든 인류에게 공히 해당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맞습니다. 지금 제가 한 것과 같은 일(유대 율법으로 금지된 일)을 말과 모범으로 매일 가르치시는 그리스도의 제자랍니다. 세상은 사랑이라는 말을 오래 전부터 알았지만 참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지요. p.720

 

제정 초기 황제 티베리우스 치하 레반트 지역을 생각하며 『벤허』를 읽는다면 세계사 속 그리스도교의 태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차원을 생각해본다면 세속의 구원에 치중한 지금의 종교에 대해 돌아보고 구원의 시원적 의미를 새겨는 계기가 될 것이다. 작가가 직접 등장해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대목이 고색창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종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이야기 재주는 인정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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