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
장폴 뒤부아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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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같은 날들이었다. 경이로운 그 4년간 나는 오로지 행복을 속성연마하고 집중 실천하는 데 몰두했다. 매일,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여전히 살아있다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까지 28년을 기다려야 했다. 달리면서 호흡을 고르고, 자유롭게 숨 쉬고, 두려움 없이 수영하고, 그날 하루가 마치 그림자가 붙어 다니듯 나와 함께 있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쁨, 그래서 밤이 와도 그 상태 그대로 그냥 좋은, 불안하게 삐걱거리던 그 땅에서 멀리 떨어져 무념무상의 평화로움에 취해보는 그 기쁨을 누리기까지 그 긴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모든 게 어긋나 흔들리던 그 땅에서 나는 도망쳤다.(p.11)

 

장폴 뒤부아 장편소설 『상속』은 화자인 폴 카트라킬리스가 가족과 집으로부터 도망쳐 4년간 이어온 행복한 나날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폴 카트라킬리스는 의사면허가 있고, 낡은 자동차와 요트를 소유한, 플로리다 마이애미 하이알라이에서 뛰는 바스크 펠로타 프로선수단에 속한 펠로타 선수였다.

폴 카트라킬리스는 툴루즈에서 태어나 ‘온종일 뇌조각을 응시하는 할아버지, 쇼트팬츠 차림으로 유사 홀아비생활을 하는 아버지, 자기 남동생과 준 부부관계에 있는 어머니, TV연속극을 켜놓고 자기 누나 품에 안겨 잠들길 좋아하는 삼촌’을 보며 자랐다.

할아버지와 외삼촌과 어머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가 자살로 사망했다는 부음을 받고 폴 카트라킬리스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자살 내력과 가족의 유품이 그대로 남아있는 툴루즈 집으로 돌아간다.

폴 카트라킬리스는 펠로타 선수로 플로리다에 정착해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구단과 선수조합의 충돌로 펠로타 경기가 쇠퇴하면서 그의 생각은 빗나간다. 그는 ‘현실적인 밥벌이’를 위해 아버지의 의원을 이어받고 아버지를 계승한다.

 

가족으로부터 상속받는 것이 재산만은 아니다.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자와 자라온 환경과 경험은 인간의 뇌에 삶을 결정하는 행동방식을 형성한다. 인간은 유전자와 성장 환경과 유년의 경험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장폴 뒤부아 『상속』의 폴 카트라킬리스는 자신이 원하는 삶과 가족에게 이어받은 삶 사이를 오가며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이다. 그는 가족 유전자 가운데 최악의 것이 자신의 유전자에 이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도망쳤다. 원하지 않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의사라는 직업과 가족의 유산을 이어받지만 펠로타 선수로 지내온 날들을 지워버리기 힘들다.

폴 카트라킬리스의 말은 유전자와 성장 환경과 유년의 경험의 영향에서 벗어나 개인이 삶을 자유로이 선택하는 일의 지난함을 드러낸다.

 

내가 이 지경으로 불행해진 원인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무엇이든 제대로 결정을 내기거나 선택하지 못한 탓이라고, 나처럼 우유부단한 사람들, 자꾸만 결단을 뒤로 미루고 일을 질질 끄는, 말하자면 겁쟁이들은 자기 잘못을 감면받으려고 매번 운명을 탓하고, 죽음, 망령, 헌팅턴 병을 이유로 내세우고, 심지어 작은 애벌레들까지 끌어들여 구실로 삼는다고,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고 일러주었다.(p.351)

 

폴은 원한 적 없는 상속을 포기할 수는 없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집을 매각하고 다시 한 번 도망 칠 수는 없었을까? 장폴 뒤부아의 『상속』은 가족이라는 관계에 맞물린 삶의 방식에 저항하여 개인이 자유로운 삶을 찾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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