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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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 이건 비탄과 시련, 슬픔이 담긴 진솔한 이야기일세. 보통 그런 이야기를 길기 마련이야. 기쁨과 행복만 가득한 이야기였다면 아주 짧았겠지.”p.545

 

기나긴 이야기다. 무려 600페이지를 넘는다. 올리버라는 조그만 아이가 얼마나 다양한 모험을 하기에 이런 두툼한 책이 되었을까. 어릴 적 TV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온통 거무스름하게 더러운 아이들이 뭉쳐서 이리저리 도망다니고 뭔가 위험한 일에 계속 연루되는, 어린아이 눈에는 억울하고 갑갑한 내용이었다. 그 때문인지 19세기 영국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에도 읽게 되지 않는 책이었다. 성인이 된 이이후에는 어린 아이 이름이 제목이니 아동물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이 책과의 거리를 멀게하는데 한 몫했다.

 

현대지성 출판사에서 완역본 『올리버 트위스트』를 잡게 된 것은 거의 이 책을 읽을 마지막 기회였던 듯싶다. 최근 이어 읽은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에 대한 호감 때문이 아니었으면 ‘가장 디킨스다운’ 소설이라는 이 책을 놓쳤을 것이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제목과는 다른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나의 선입견도 보기 좋게 깨졌다. 아이의 이름을 표제로 내세운 것과 다르게 아이의 이야기가 주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자 또한 작품 해설에서 이 점을 짚고 있다.

 

사실 올리버라는 인물 자체는 그다지 우리의 관심을 계속 끌지 않는다. …… 그밖에 대부분의 경우에 올리버란 인물은 어떤 상징으로 작용한다. 초반에는 구빈원 시스템의 희생양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완전무결한 순수함을 상징하게 된다. 따라서 이 소설의 힘은 주인공이 아니라, 각양가색의 다채로운 등장인물이 뒤섞여 벌어지는 아수라장 같은 이야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p.605

 

어른이 되어 읽는 『올리버 트위스트』는 고난을 거쳐 행복을 찾는 아이의 이야기라기 보다 19세기 영국의 밑바닥을 사는 사람들과 그 주변의 이야기다. 올리버가 태어나 성장하는 구빈원의 부조리한 상황, 요즘의 기준으론 아직 어린 아이임에도 노동현장에 투입돼 어이없는 처우 끝에 죽음의 위협을 맏닥뜨리는 일, 거리의 아이들을 등쳐먹는 어른들의 이야기다. 특히 책 초반의 구빈원의 운영 상황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실소가 튀어나오는 대목이 많았다. 작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비판적으로 풍자한다. 9살 먹은 올리버가 구빈원을 나가 일터로 가게 된 상황을 서술한 대목이다.

 

낡은 밧줄의 실밥을 푸는 간단한 과정 속에서 교육과 기술이라는 두 가지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올리버는 말단 교구관의 지시에 따라 꾸벅 감사인사를 올린 다움, 서둘러 커다란 보호소 건물로 끌려가서 거칠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훌쩍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이 축복받은 나라의 자상한 법률에 따른 사례를 어디에서 이토록 고귀하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다니! p.32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일터에서의 노동착취를 ‘교육과 기술이라는 축복’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나라를 ‘축복받은 나라’로, 아이들을 착취 현장으로 보내도록 강제하는 법률을 ‘자상한 법률’로 묘사하고 있다. 구빈원이 가난한 사람에게 지나친 복지를 제공한다고 판단한 이사회의 신사들의 결정에 대한 서술에서도 풍자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로 가든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이사회의 신사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구빈원 안에서 서서히 굶어죽든가, 아니면 바깥에서 빠르게 굶어죽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규칙을 세웠다. p.33

 

올리버 주위의 인물 중 가장 눈에 들어온 캐릭터는 낸시였다. 초반에 부유한 집에서 보호받게 된 올리버를 좀도둑 집단으로 다시 데려오는 역할을 맡았던 여자다. 낸시는 올리버가 억울하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위험을 무릎쓰고 올리버를 돕는다. 올리버가 다시 안전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에 자신도 구원받을 기회가 생기지만 놀랍게도 낸시는 그 제의를 거절한다. 올리버에게 해를 끼친 악한을 사랑하기 때문인지 자신이 쌓은 악덕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죽을 것을 알면서 무덤으로 걸어들어간 낸시를 이해할 수 없는 한편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호함을 드러내는 인물로 보였다. 잔인한 악당과 당연한 듯 선한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혼돈과 두려움으로 갈등하는 낸시가 다른 인물들의 전형성을 상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저는 과거에 얽매어 있어요. 지금은 진저리나게 싫지만 떠날 수는 없어요.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온 걸요. 뭐, 모르겠어요. 얼마 전만 해도 그런 말은 그냥 웃어넘겼을 거예요. 하지만,” …… “또다시 두려움이 몰려오고 있어요. 어서 집에 가야겠어요.” p.514

 

작가 디킨스는 이 작품을 통해 “현실에서 실재하면서 거짓 광채로 둘러싸인 무언가에 대해, 그것의 추하고 역겨운 모습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그 광채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 인물의 타락하고 추악한 면모를 말과 행동으로써 공들여 입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독자의 자연스러운 추론에 의해 그의 실체가 가장 저열하고 악독한 유에 속한다는 결론에 이르기”를 바랐다고 한다. “특히 주인공 소녀(낸시)의 경우에는 이 의도를 한결같이 유지”(p.15)했다고 말했는데 나의 경우에는 이 책의 서술에서 낸시의 저열함보다는 갈등하는 인간이 보였다. 이 또한 작가의 ‘비꼬기’일까 싶다.

 

“나는 모든 역경에서 살아남아 결국 승리하는 선의 원리를 소년 올리버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한 디킨스의 목적은 이 책에서 잘 구현되었다. 그러나 더 크게는 그 시대이 밑바닥을 산 사람들의 면모와 그들을 바라보는 상위 계급의 사람들을 일별해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디킨스의 바램처럼 소년 올리버의 어떤 성공에 눈을 두느냐 근대 사회의 세밀화로 보느냐는 독자의 몫이다.

 

책에 담긴 삽화가 읽기의 즐거움에 일조했다. 삽화가 조지 크룩생크는 디킨스와 동시대인이다. 때문에 그 시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은 그림을 볼 수 있어 이야기를 더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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