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퍼링 룸 스토리콜렉터 80
딘 쿤츠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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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청바지에 티셔츠, 스포츠 코트를 걸치고도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 뺨치게 아름다운 여성이 한 언론인의 집에 침입한다. 그리고 남자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 문을 나서길 차분히 기다린다. 여자의 이름은 제인 호크, 일급 지명수배자가 된 전 FBI 수사요원이다. 그녀가 남자를 찾은 이유는 뭘까.

 

소설의 첫머리는 사실 주인공 제인 호크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머리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자살 폭탄 테러를 벌이는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망상에 빠진 것도 같고 최면에 걸린 것도 같은 전직 교사였던 여자는 불붙은 휘발유를 차에 한 가득 싣고 호텔로 직진한다. 소설은 제인의 시점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시점이 긴급하게 이어져간다. 전직 교사가 왜 난데 없이 폭탄테러를 벌이게 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동시에 제인 호크가 남편의 복수를 하는 이야기가 병행된다.

 

『위스퍼링 룸』은 전작 『사일런트 코너』의 후속편이다. 작가 딘 쿤츠의 제인 호크 3부작 시리즈 중 1, 2편이다. 『사일런트 코너』에서는 제인의 남편이 갑자기 죽고 제인이 수배자가 되는 과정, 그리고 3부작의 핵심적인 사건들이 드러난다. 『위스퍼링 룸』에서 제인은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 집단에 접근하한다. 제인의 남편을 죽게 한 집단은 권력자와 결탁하고 첨찬 나노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려한다.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생체 임플란트를 주입해 자살로 이끈다. 제인은 이러한 일들을 폭로하려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영속시키면서 추악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은 언제나 있어온 일이다. 그 과정에서 세상은 디스토피아가 된다. 소설 속에서 권력자들은 세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위험한 생각을 할 만한 일정한 수의 사람을 선별해 제거하려 한다. 그 제거 방법이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혈관에 주사하는 나노 임플란트가 그것인데 이것은 피해자의 정신을 권력자 입맛대로 조종한다. 이 주사를 맞은 사람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접속암호를 말하는 사람의 지시대로 따르는 인형이 된다.

 

그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한 짓을 할 힘이 있었다. 사람을 망가뜨리는 능력, 기억을 지우고, 자유의지를 빼앗고, 유순한 노예로 전락시킬 능력이 있었다. p.19

 

버톨드 슈넥은 혈청에 용해해서 혈관에 주입하는 나노머신을 개발했어요. 극도로 미세한 수십만 개의 부품이 혈관을 타고 뇌로 올라가죠. 이 부품들은 모세혈관벽을 통과해 뇌세포로 들어가면 더 큰 네트워크로 자가조립돼요. p.35

 

"그들의 컴퓨터 모델은 세대별로 문화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위험한 생각으로 문명을 낭떠러지로 밀어낼 수 있다고 추측되는 미국인들을 결정적인 숫자만큼 선별해요."

"컴퓨터 모델은 개발자가 원하는 결과를 내놓도록 설계됩니다."

"…그러니 컴퓨터에 따라, 매년 위험인물 8천4백 명을 제거하면 모두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겁니까?"

"이미 죽였다니까요. 많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렇게 믿기 힘든가요? 인류 역사만큼 오래된 개념이에요." pp.38-39

 

인류를 조종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스적 이상향에서 이름을 따온 이들 ‘아르카디언’들은 안전한 세상을 만든다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추악함을 감추고 있다. 권력의 맛에 취한 인간은 나노 임플란트 없이도 뇌 구조가 변한다. 자신의 욕망은 그것이 어떤 형태라도 옳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비단 소설속의 설정이 아니다. 권력자가 자신의 추레한 욕망을 어떻게 실현시키고 또 그것을 없었던 일 또는 실수로 일어난 일로 치부하는지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아까 느낀 불안감은 그와 아르카디언이 역사의 올바른 쪽에 서 있을 뿐 아니라 과거의 역사도 모두 새로 쓸 수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잠시 잊었던 탓에 생긴 순간적인 감정이었다. 불편한 사실과 역사는 그들이 모두 과거의 기록에서 제거할 것이다. 미래, 앞으로 올 역사 역시 영원까지 매일 그들이 쓸 수 있다. p.419

 

억만장자 데이비드 마이클과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여러 모습으로, 서로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다른 모습들로 비치는 거울로 이뤄진 기만의 미로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 사회적, 정치적 엘리트들의 비밀스러운 삶, 진짜 삶은 시궁창 속에 수행되고 있었다. p.96

 

그들은 인간보다, 자시들에게 더 중요한 이상에 몰두하는 지식인들이었다.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믿는 지식인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에 속한다. 문제는 모든 지식인들이, 타인들이 인정해주고 그들에게서 지혜의 말을 구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지식인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자기가 탁월하다고 증명하는 시험을 치를 필요도 없고, 자격증을 발급하는 공인된 위원회도 없다. 미용사 자격을 따는 것보다 지식인으로 칭송받는 것이 더 쉽다. pp.96-97

 

권력집단은 사람을 통제는 목적이 세상을 위한 일이라고 말한다. 악을 행할 의지를 억제하고 목표없는 무의미한 삶을 구원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권력자가 말하는 ‘악’은 과연 누구에게나 악한 것일까. 또 권력자의 눈에 불행한 삶이 과연 당사자 모두에게도 삶을 제거할만큼 의미없는 것일까.

 

"…본인이 악을 행할 자유의지가 억제되고 있다는 걸 전혀 의심조차 못하게 될 겁니다. 그들의 결정과 행동은 언제나 자신의 선택처럼 느껴지겠지요. 의견이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이성에 의해 사고 변화로 여기도록 아주 미묘하게 가치관과 윤리관이 조정될 겁니다."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윤리적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무엇이 올바른 가치관인지 결정하는 건 오로지 당신이겠군."

"끔찍함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세요, 제인. 그 모든 혼돈을. 전쟁과 불평등. 편견과 증오. 질투와 탐욕. 인류가 설계하고 승인한 선악의 관례. 그게 통했나요, 제인?" p.539

 

"세상은 목표의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요. 무의미한 존재로, 종종 절망 속에서 방황할 뿐이지요. 우리는 목표 없는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을 골라서 불행함의 원인을 제거하고 목적을 주었어요. 당신 남편의 경우, 우리는 대중이 만족할 기회를 얻는데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한 겁니다." p.540

 

권력자가 세상을 위해 누군가의 자유를 통제하는 기술 또는 제도를 만든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본래의 목적으로만 사용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지 모를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나노 임플란트 기술은 결국 권력자의 쾌락을 위해 봉사는 도구가 된다.

 

"…이건 사람들이 자살하도록 만드는 임플란트와는 다른 종류의 임플란트거든. 이 임플란트는 단순히 여자들을 세뇌만 시키는 게 아니야.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직물이 너덜너덕해지도록 문질러서 기억을 씻어버리고 성격도 표백하고, 새로운 성격을 심어. 원래 인간을 되돌릴 희망이 없어. 일방적인 과정이야. 어느 누구의 딸도 모든 사람의 장난감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이거야말로 정말 끝내주는 개념 아닌가?" p.157

 

"이건 섹스라기보다 권력을 충족시키려는 욕망이야. … 그 여자들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욕망." p.157

 

제인 호크는 세상을 통제하려는 권력자들과 맞선다. 남편의 복수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선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시민사회를 보호하고 권력자들의 폭압을 막으려는 일에 나서게 된다.

 

시민사회는 법 없이 지속될 수 없다. 법에 의한 통치가 약화되면, 강자가 약자를 등처먹는다. 법에 의한 통치가 무너지면 온갖 야만이 뒤따르고, 거리에는 묵시록에 나오는 역병과 재난 영화의 끔찍한 장면들이 순진한 어린아이의 상상으로 여겨질 만큼 어마어마한 피가 흐른다. 부패한 자들이 더욱 대담하게 도둑질하고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한때 청정했던 조직에 부패가 퍼져 나가는 모습을, 그는 오랫동안 걱정스러운 눈으로 봐왔다. p.107

 

…가망없어 보인다고 해서, 이 사건에서 등을 돌리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이 가망없다는 데 안주하는 것은 비겁함의 한 형태에 다름아니다. p.107

 

일단 진실을 알게 되면,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잊을 수도 없다. 언제나 가슴 속에 어둠이 들어앉아 그를 보상해줄 한 줄기 빛을 평생 찾아 헤매게 된다. p.247

 

아직도 미래에 자유의 희망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완벽에 가까운 이 시대의 기술을 운영하는 것이 어디까지나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역설적인 사실에 있을 것이다. p.448

 

지금 자신은 세상의 모든 미리엄을 위해, 자칭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광적으로 몰입하는 이데올로기나 명성에 큰 관심 없이 충만한 삶을 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고, 그들을 위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오랜 세월 동안 미리엄과 버니 같은 무수한 사람들이야말로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근간이었고, 그렇기에 D.J. 마이클 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그토록 경멸하고 억누르려 한다는 것을. 자유와 존중이야말로 절대권력에, 권력자들이 타인에게 요구하는 졍배에 맞설 장벽이라는 것을. p.493

 

『위스퍼링 룸』의 끝에서 제인이 만난 것은 더 커진 권력 조직의 테두리다. 목표로 삼았던 사건의 배후를 제거했지만 문제의 매듭은 풀리지 않는다. 3부작의 마지막 편을 예비하기 위한 작가의 복선일 것이다.

 

작가 딘 쿤츠는 “스티븐 킹과 어깨를 겨루는 서스펜스 소설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작가”다.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5억부 이상을 판매한 작가답게 시종 긴장감 넘치는 전개가 이어졌다. 특히 누가 나노 임플란트를 주입받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전과 다른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혹시’하는 의문을 가지게 됐다. 여전히 의심되는 정황을 그대로 둔 채 책이 끝나버려서 어서 빨리 다음 편을 입수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모든 것을 갖춘 책이었다. 뇌를 조종하는 통제 매커니즘, 모든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사회, 통제에 저항하는 자유 수호자들, 그들을 조용히 돕는 조력자들. 여주인공의 매력은 덤이다. 대체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보다 더 아름다운 첩보요원이라니, 이 대목부터 상상력의 절대치가 필요하다. 전편 『사일런트 코너』를 읽지 않았어도 독서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책이었다. 이 책은 이 책대로 완벽한 서사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또한 작가의 능력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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