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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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서야 표지의 얼룩이 무엇인지 알아보게 됐다. 신기하게도 그 전에는 제목 아래에 있는 그 어둑한 그림자가 무슨 모양인지 몰랐다. 내 눈엔 그저 공원에 앉은 사람들만 보였고 화창한 하늘에 낀 작은 구름 때문에 잔디 일부분에 그늘이 져 있는 모양새로만 보였다. 일상에 길들여진 대로 보는 눈이 그려낸 광경이었다.

 

스티븐 킹은 공포 소설의 대가가 아니었던가. 무서운 이야기를 즐기지 않는 편이어서 스티븐 킹의 책을 읽을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이번 책「고도에서」는 그에게 전과 다른 칭호를 붙이고 있다. “스윗 킹”이라고. 공포의 제왕이 쓴 달콤한 이야기라면 읽어도 괜찮겠지 싶었다.

 

책에는 현실을 뛰어넘는 설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귀여운 수준이다. 주인공 스콧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체중감소 현상을 겪는다. 희한한 일은 외모나 신체 능력의 변화는 전혀 없다는 거다. 느껴지는 증상은 그저 몸이 중력의 감옥을 벗어나고 있다는 정도. 초현실적인 현상이다. 딱 여기까지 킹의 명성에 걸맞는 부분이었다.

 

스콧의 이웃에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레즈비언 커플 디어드리와 미시가 산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이지만 보수적인 마을에서는 이들의 공개적인 행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정체성을 쉬쉬하며 숨기지 않고 지나치게 당당하다는게 이유다. 아무리 멋지고 입맛 당기는 메뉴를 내놓는다 해도 그들이 ‘결혼한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레스토랑은 파산 위기에 처해있다. 이들이 게이커플이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점이 있었을까. 그건 좀 다른 문제고.

 

“그러니까…… 레즈비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결혼까지 한 레즈비언이지. 그건 절대 타협 안 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 (…)”

“(…) 그 여자들이 정체를 숨기고 살았으면 괜찮았을 거야. 그런데 안 그랬잖아. (…)” p.65

 

마을 전체가 디어드리와 미시를 터부시 한다. 스콧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가벼워진 몸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몸에 변화가 오지 않았었다면 스콧은 레즈비언 커플에게 마음이 기울었을까.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상황,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직접 몸으로 겪고 있기 때문에 소외된 이웃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이 동네 전체가 레즈비언을 부결했다. 선거 투표에서 부결한 것만 뜻하는 게 아니다. 이 마을의 표어가 ‘남들 모르게 못하겠으면 나가라.’인가 싶다. p.104

 

디어드리는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태도에 마음의 문을 닫는다. 이웃들이 뭐라든 스콧은 디어드리 커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그러한 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기적은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를 특히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한 발 다가가는데 필요한 건 한 잔의 와인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스콧이 치즈, 크래커, 그리고 올리브와 함께 준비한 피노 와인 한 잔이 두 사람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p.150

 

스콧에게 찾아온 마지막이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칠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찾아온 비현실적인 일이 사실이라면 아직 알 수 없는 미래 또한 생각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스콧은 그의 삶에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다만 ‘행복’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스콧은 자신이 가진 체력의 극치를 경험했다. 신세계였다.

그는 만사가 다 이와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 고양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p.136

 

과거는 역사이고 미래는 불가사의다. p.97

 

디어드리는 마지막 순간에 도와달라는 스콧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스콧과 디어드리, 그 둘은 다름을 이유로 타자화되어 소외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전같으면 서로를 수용할 일이 없었을 그들이 이제 상대를 완벽히 이해한다.

 

“그리고 저는 병실이나 정부 기관에서 검사나 당하면서 이 체중 감소 프로그램의 남은 시간을 허송하고 싶지 않아요.” 스콧이 말했다. “어쩌면 대중들의 흥밋거리나 되거나요.”

디어드리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완벽하게 이해돼요.” p.159-160

 

소설은 이해와 포용의 이야기였다 그것도 아주 따뜻한 이야기 말이다. 킹의 소설이 이런 식이라면 내가 그간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은 지나치게 겁먹은 행동이었다. 설정이 어떻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이야기, 사회의 그늘에 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라면 게다가 그토록 흥미진진하다면 얼마간의 으스스함은 견딜만 할 것 같다.

 

내가 책 표지를 보면서 당연한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스콧도 디어드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은 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변화로 인해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소외된 타인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내가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지의 그림자 모양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래서 스콧에 대해 뭉클한 마음이 더 커졌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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