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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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이 맞나? 「일생일대의 거래」을 들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책의 부피는 그간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이야기의 향연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다. 책 뒷면에 친절히 소개되어 있는 바를 보자면 그의 필력은 무려 다음과 같다. 「오베라는 남자」452쪽,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552쪽, 「브릿마리 여기있다」480쪽,「베어타운」 572쪽, 「우리와 당신들」 602쪽. 이중 「우리와 당신들」을 재밌게 읽었다. 서사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장이 쉴 새 없이 넘어갔다.

 

소설은 그 길이가 짧아질수록 그 안에 담기는 의미가 압축된다. 상세한 설명과 묘사 없이 뚝뚝 떨어진 장면들을 서로 연결해 상상해야 한다. 이 작가에게 기대한 소설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호기심도 일었다. 이렇게 프레드릭 베크만이 쓴 두 개의 중편 중 하나인「일생일대의 거래」와 조우했다.

 

이건 한 생명을 구하려면 어떤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어야 하는지를 다룬 짧은 이야기다. 미래뿐 아니라 과거까지 걸린 문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이 아니라 뒤에 남긴 발자취가 걸린 문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게 전부라면, 그게 당신의 전부라면 누굴 위해 당신을 내어 줄 수 있을까? p.5

 

꽤 무거운 주제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도입부로 시작한다.

 

안녕, 아빠다. 조만간 일어나겠구나. 헬싱보리는 지금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일 텐데. 나는 사람을 죽였다. p.11

 

자녀에게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인사를 건네면서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하는 아버지라니. 「이방인」의 첫 문장에 대한 오마주라도 되는 걸까.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누굴 죽인 걸까. 그걸 왜 아이에게 고백하듯 말하는 걸까. 데뷔작부터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작가다운 시작이다.

 

그 후의 이야기는 도입부의 궁금증을 풀어가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자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던 주인공은 가족을 버리다시피 하던 끝에 홀로 되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이루지만 병마를 피하지 못한다. 입원한 병원에서 불치병에 걸린 소녀와 죽음의 사자를 만난 그는 하나의 죽음으로 다른 하나의 죽음을 대신하려 한다. 아니 하나의 목숨으로 다른 목숨을 사려한다.

 

“다른 사람들 데려가요! 다른 사람을 줄 테니 그 사람을 죽여요!” p.21

 

평생 남자의 주변을 맴돌며 죽음의 순간을 경고해주던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어김없이 병원에도 나타난다. 뭔가 잔뜩 적힌 폴더를 들고 까만 연필로 그 위에 뭔가를 표시하는 으스스한 분위기의 여자. 그녀는 그 병원에서 누구를 데려가려는 걸까. 그? 소녀? 언제 올지 모를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남자는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행복이란 승자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갖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행복은 어린아이나 동물을 위한 것이고 거기엔 실질적인 기능이 전혀 없다.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세상에는 예술도 음악도 마천루도, 발견도 혁신도 없다. 모든 리더, 네가 아는 모든 영웅은 하나같이 집착이 심하다. 행복한 사람들은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고, 질병을 치료하거나 비행기를 띄우는 데 일생을 바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를 위해 살고 오로지 소비자로서 지구상에 존재한다. 나와 다르게. pp.73-74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날 그의 마음에 동요가 생긴다.

 

그리고 나는 궁금해졌다. 내가 그 개들처럼 행복한 적이 있었는지. 그 정도로 행복해질 수 있었는지. 행복해지는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p.74

 

“암이 있으면 가구에 낙서해도 되”는 걸 알고 자신을 보며 우는 엄마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할 줄 아는 다섯 살짜리 아이는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를 무서워한다. 회색 스웨터 아줌마가 오지 못하게 보초를 서겠다고 아이와 약속한 남자는 자신에게 큰 변화가 닥친 걸 알아챈다.

 

남자에게 중요한 건 시간이다. 그리고 1초의 가치를 믿으며 인생을 건 마지막 거래를 한다. 그가 건 1초의 가치는 무엇인지, 그의 마지막 거래는 성공했는지는 각자가 확인해 보시길.

 

많은 의미를 눌러담은 동화같은 소설이다. 중편이라 부르기에도 짧아 보이는 분량이지만 삶에 대해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해 행복과 희생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책의 만듦새도 좋았다. 표지부터 속지의 삽화들까지 따스한 색감의 그림들이 들어있다. 이야기를 담되 울림을 더 크게 만드는 이미지들을 보며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다 보면 어느새 첫 페이지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선택을 곱씹어 보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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