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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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에 조선 역사의 비밀이 담겨있다는 설정만으로도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서철원 장편소설 《최후의 만찬》은 정조 15년 신해박해의 순간에서 시작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교도 박해 사건이다. 이 일은 죽음으로도 꺾을 수 없는 종교적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권력자들에게 알렸다. 소설 초반에는 권력의 횡포에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모아가는 풀뿌리같은 백성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은가 생각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읽기에 문제가 생겼다. 우선 문체가 버거웠다. 처음엔 본격적인 역사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 고색창연한 ‘궁체’로 쓰인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마치 김훈 작가가 시로 쓴 역사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은유로 씌여진 시의 세계를 해독하는데 장애를 가진 독자로서는 줄줄이 이어지는 시적 문장들의 의미를 다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후로는 이야기의 맥을 놓쳤다. 천주교가 탄압당하는 현실에서 사대부 정약용의 종교적 갈등을 말하나 싶다가 6명의 야인들이 믿음을 이유로 삶을 박탈당하고 복수를 다짐하는 이야기인가도 싶었다. 그러다 맨손으로 불을 다루는 초월의 아이가 등장한 뒤로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살만 류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에서 낯익은 설정들이 머리 속을 오갔다.

 

무엇보다 장영실(1390~?)과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우정이라는 설정에서 소설적 몰입도가 떨어졌다. 소설적 설정이니 출생연도를 들이대며 논픽션적 해석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려 노력했다.하지만 장영실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1495~1498)에 영향을 미치려면 100살이 훨씬 넘게 장수해야했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려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림 최후의 만찬의 숨은 의도를 홍대용의 입에서 프리메이슨이 나오고, 조선의 지리에 숨은 성배이야기가 등장했을 때는 이제 영화 <인디아나 존스>로 가나 싶었다. 이야기는 정약용이 카메라 옵스큐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찍고 인화해내면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영화 <디 아더스>의 분위기를 풍기며 끝을 맺었다.

 

수많은 흥미로운 소재들이 등장하는 소설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각각 떨어진 지성인들이 서로의 지혜를 나눈 순간에 대한 상상, 누구나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천국을 바라보며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아비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채 분열하는 조정을 조율하고 밀려드는 서양의 힘에 대항해야 했던 정조, 믿음으로 인해 삶이 지워진 사람들이 행하는 복수의 무상함.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철학적 상념과 인물의 심리에 대한 은유 가득한 묘사들까지. 작가는 이 소설에 애착이 컸던 것 같다. 아무 것도 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사이 소설은 제 갈 길을 잃은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에 대한 이런 판단의 나의 오독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이 책은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소설 관한 전문가들이 263편의 응모작 중에 골라 ‘보기 드문 수작’으로 평가했다. 심사에 참여했던 한 원로소설가의 말처럼 정말 아름다운 작품을 내가 몰라본 것이라면 개인의 취향과 독해 능력 부족이 원인인 것이니 문제될 게 없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견해 차이는 각종 문학상을 심사하며 문학계를 이끄는 사람들과 일반 독자 간의 거리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부디 전자 쪽이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문학을 읽는 일이 점점 더 괴로워질 것이므로.

 

“이 작품의 감성은 무지갯살처럼 아름답다. 난해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문장은 시적이고 환상적이다. 같은 작가로서 시샘이 날 정도이다.”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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