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플로베르는 자신의 소설에 삽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부적절한 정밀성”은 책이 의도하는 효과에 방해가 된다. 예술의 목적은 보게 하고 그다음은 꿈꾸게 하는 것이다. p.390

부지런한 작가다. 적잖은 소설을 쓴데다 얼마전 요리에세이 출간 소식을 들었던 것 같은데 이번엔 미술에세이다.「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이야기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마치 학자가 쓴 것 같은 무게감을 느꼈었다. 작가의 지식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삶을 보는 시각이 무척 넓다는 느낌이었다. 배울게 많지만 가까이하기엔 부담스러운 선생님 같은 느낌이랄까.

저자는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의식적인 보기’를 시작했다. 그저 흘려보는 행동이 아니라 보고 있는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의식적 보기’로 미술에 대한 눈을 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미술과 삶에 대해 정의한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가 기억하는 한 바로 거기서 생전 처음으로, 내가 그림 앞에서 소극적이고 순종적으로 서 있지 않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p.11

 

미술은 단순히 흥분을, 삶의 전율을 포착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미술은 가끔 더 큰 기능을 한다. 미술은 바로 그 전율이다. p.18

작가가 해설한 17명의 화가에 대해선 다 일별하기 어려웠지만 미술을 감상하는 태도 그리고 작품과 화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서술에 공감했다. ‘노련한 관람객’에 대한 묘사에는 얼핏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관람객으로서 노련해지기 위해서는 혈당 조절과 타고난 신체 조건까지 필요했던 거다. 노련과는 거리가 먼 미숙한 관람객이지만 전시회의 크기가 감동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에는 충분히 동의한다. 훌륭한 큐레이션이라면 작품의 숫자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노련한 관람객이라도, 그래서 혈당의 높낮이와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 사이의 연관성을 잘 알고 열린 공간을 잘 활용할 줄 알고, 필요한 경우 전시된 그림들을 마지막 것에서부터 연대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도록을 보거나 그림 옆에 붙은 제목을 보려고 기웃거리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시야를 가리지 않을 만큼 키가 크고, 그림 안내용 헤드폰을 쓴 미술 애호가들에게 떠밀리지 않을 만큼 튼튼한 그런 노련한 관람객이라도, 큰 전시회를 다 보고나면 무언가 미흡했다는 느낌이 공격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pp.116-117

책에는 화가의 삶과 작품의 의미는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가에 대한 문제가 여러 번에 걸쳐 서술되고 있다. 성실한 삶을 산 작가의 작품에 등장한 선정성은 표출하지 못한 욕망으로 볼 것인가, 또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작가가 그린 서정적인 그림에 보이는 그대로 감동할 것인가. 작가는 여러 화가의 경우를 대입해 이런 부조화를 설명해보려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말해야 하지만 화가의 삶을 떼어놓고 그림만으로 그 의미를 다 알 수도 없는 일이다.

어쩌면 화가의 삶을 보고 그것으로 그 또는 그녀의 예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채색하거나 결정짓는 대신, 그 반대편에 서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p.193

전기는 중립적일 수 없으니, 최근 뷔야르의 일부 초기 작품들은 아무리 그 의도가 좋고 고상한 것이라 해도 일종의 일화주의적 해석에 종속되고 있다. 그의 삶과 관련된 사실들이 알려지고 사진들이 나오면서 결론들이 생산되는 것이다. p.241

화가에게 생명과 의의를 부여하고 그를 빛나게 하는 건 작품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p.351

그림에 대한 해석이 화가의 전기에 영향 받지 않도록 아무리 조심해도, 일단 이런 이야기들을 알게 된 이상 우리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p.374

줄리언 반스는 미술 작품과 작가의 삶의 관계에 대해 바르트를 인용한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작품을 보는 관람객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시간과 함께 희미해진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다. 텍스트를 저자의 의도에서 해방시키고 독자에게 자율권을 준 것이다.……그런데, 이처럼 문학에는 통하지 않는 것이 정작 미술에 잘 들어맞는다. 그림은 화가의 의도에서 벗어나 해방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독자’의 자율권은 더 커진다. p.346

예술의 목적은 보게 하고 꿈꾸게 하는 것이라는 플로베르의 말에 동의한다면 작품을 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작품을 만든 이의 의도도 아니고 그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나 만들 수 밖에 없었던 환경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그 앞에 걸음을 멈추게 되는가, 그 뿐이다.

중요한 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물건이고, 이에 대한 우리의 살아있는 반응이다. 평가기준은 간단하다. 그것이 우리 눈의 관심을 끄는가? 두뇌를 흥분시키는가? 정신을 자극하여 사색으로 이끄는가? 가슴에 감동을 주는가?……예술이 주는 지속적인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의외의 각도에서 접근하여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힘이다. p.347

줄리언 반스는 나에게 말씀이 어려운 선생님이지만 전공분야를 떠난 미술에 관한 에세이라면 다를까 싶어 읽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위트있는 문장과 미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수없이 반짝였지만 미술 지식이 빈약한 독자에겐 소화하기 어려웠다. 읽기의 어려움은 책 중반 이후 이름도 아름다운 ‘나비파’ 보나르가 등장하면서부터 심해졌다. 문장 속에 화가와 평론가, 소설가(특히 플로베르)가 등장해 예술에 대한 뜻있는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나 홀로 안드로메다에 있는 기분도 간혹 들었다. 현대 미술에 대한 나의 일천한 지식 때문인지 작가가 공들인 문장의 맥락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미술계의 한 시절, 특히 작가를 매혹한다는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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