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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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용 책으로 알려졌던 「걸리버 여행기」의 풀버전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동안 읽지 않았다. ‘풍자문학’이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내 개념으로는 ‘풍자’는 곧 ‘웃긴 이야기’였다.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가 살았던 17세기 당대를 웃기게 쓴 책에 관심이 없었던 게다. 호기심이 생긴 계기는 ‘라퓨타’와 ‘야후’ 때문이다. 이 두 단어 모두 출처가 「걸리버 여행기」였다.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와 지금은 잊혀진 포털 ‘야후’의 이름이 모두 이 책에서 나왔다니. 대체 「걸리버 여행기」에는 무슨 얘기를 하는 책일까.

 

‘완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 중 검색 상위에 나오는 책을 몇 년전에 읽었다. 익숙한 거인국, 소인국을 다룬 장도 흥미로웠지만 그 뒤의 내용은 책의 진가를 깨닫게 했다.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을 이 세상에 없는 세계를 배경으로 현실보다 더 실감나게 그리고 있었다. 관심을 가지고 이런 저런 「걸리버 여행기」와 관련한 주변 내용을 찾아보며 읽다보니 번역이 눈에 걸렸다. 잘 이해안되는 대목을 원문(프로젝트 구텐베르크)과 대조하게 하던 중 내가 읽고 있는 번역이 실망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서지를 보니 초판이 1992년. 그 긴 세월동안 교정한번 안한 책이었다. 다른 믿을 만한 번역으로 다시 읽고 싶었다. 새 번역을 기다렸다.

 

9월 초 「걸리버 여행기」가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로 나왔다. 번역자 이름을 가장 먼저 확인했다. 전문 번역가 이종인. 「숨결이 바람될 때」, 「로마제국 쇠망사」, 「리비우스 로마사」등으로 번역에 대한 신뢰감이 두터운 분이다. 특히 역사에 대한 지식이 남다른 번역자로 알고 있어서 작품 해설까지 기대됐다.

 

이번 현대지성 판의 장점은 대부분 역자에게서 기인한다. 매끄러운 번역은 기본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기 위해선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작품의 인물이나 장소, 사건 등이 그 시대의 특정 소재를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상상의 이야기로만 읽어도 재밌는 책이다. 작가의 섬세한 묘사 덕에 거인국, 소인국에서의 생활이나 라퓨타 섬에서의 모험 등이 생생하다. 하지만 비유의 대상을 알고 읽을 때 더 큰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역자는 각주를 충실히 달아 이런 비유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덕분에 17세기 영국사를 한 번 정리하는 효과를 얻었다.

 

책 뒤에 붙은 해제와 작품해설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일독하기를 권하고 싶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일대기와 함께 그가 출판한 작품들에 대한 해설이 들어있다. 작가에 대해 잘 알게 됨은 물론이고 그가 어떤 정치적,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저술에 임했는지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해제 부분을 읽고 번역자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 스위프트가 비밀결혼했다고 알려진 에스터 존슨에 대한 부분 때문이다. 타 번역본에서는 에스터 존슨과 스텔라를 두 명의 인물로 다루고 있었다. 에스터 존슨은 후에 스텔라로 불렸으며 스위프트와 평생지기로 사후에도 나란히 묻힌 인물이다. 이런 오류를 담은 책이 수십 쇄를 찍었다.

 

걸리버의 여행 중 두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자들을 소환해내는 마법사의 섬 글럽덥드립과 럭낵의 스트럴드브럭 이야기다. 글럽덥드립에서 역사적 인물 수백명을 만나는 내용이 내겐 거인국, 소인국 여행보다 흥미진진했다. 눈앞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전쟁과 한니발의 행군을 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메로스와 담소를 나누는 호사를 누린 걸리버가 부러워지는 장면이었다. 이로써 걸리버 머릿속의 고대사와 현대사는 수정된다. 진실은 언제나 직접 대면하기 누추한 경우가 다반사인 모양이다.

 

세상의 위대한 사업과 혁명의 근원과 동기를 알게 되고, 그런 일의 성공이 한심스럽게도 우연에 불과했다는 점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느낌 인간의 지혜와 지성에 대한 실망은 얼마였던가. pp.244-245

 

죽음과 영생에 대한 스위프트의 통찰을 볼 수 있는 스트럴드브럭 이야기는 내게도 질분으로 남는다. 젊음 없는 장수가 과연 바람직할까. 겉모습은 건강할지라도 나이 들수록 경직돼가는 정신과 마음은 후손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세월만큼 현명해지는 일은 희귀한 것인데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탐욕은 어찌해야 할까.

 

부와 건강을 지닌 채 한창 젊을 때의 육신을 한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고령에 수반되는 일반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영생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괴로운 상태로 불사의 몸이 되고자 소망하는 자는 거의 없겠지만, 앞서 말한 두 왕국, 그러니까 발니바비와 일본에서 저는 모든 사람이 조금이라도 죽음을 뒤로 미루고 최대한 늦게 죽음과 마주하길 원하는 걸 봤습니다. p.260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탐욕은 고령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니만큼 죽지 않는 그들이 온 나라를 그들의 손아귀에 거머쥐고 국가 권력을 독점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욕심만 많았지 관리 능력은 거의 없으므로 필경에는 나라는 멸망하게 만들 것이다. p.264

 

가장 서글펐던 대목이다. 죽지 않는 인간 스트럴드브럭과 독서에 대한 부분이다. 내 독서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 지금도 이미 스트럴드브럭이 돼있는건 아닐까.

 

같은 이유로 그들은 책을 읽으면서 절대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한 문장을 읽더라도 끝부분에 도달하면 처음 읽었던 부분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런 결점으로 인해 그들은 기억이 좋았더라면 누렸을 수도 있는 단 하나의 오락마저도 빼앗기고 맙니다. p.262

 

스위프트는 요즘 시국에 필요할 듯한 해법도 제시해준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처치같은데 이런 정밀한 기술을 가진 의사가 없는 게 아쉽다.

 

그는 당쟁이 격렬할 때 이를 중재하는 훌륭한 방법도 고안해냈다.……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반쪽 뇌 두 개가 하나릐 두개골 안에서 화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곧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되어 중용은 물론 생각의 일관성까지 생겨날 것이라고 했다. 중용과 일관성은 자신이 세상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통치하고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머리에 꼭 생겨났으면 하는 자질이기도 하다. 정당 지도자들의 뇌 용량이나 품질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이 의사는 자신이 아는 바에 의하면 아주 사소한 차이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p.231

 

「걸리버 여행기」를 동화로만 읽기엔 아깝다. 설정은 동화에서 시작하지만 읽다보면 결코 풍자만은 아닌 맨살의 사회를 보여준다. 가상의 이야기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는 것이 오히려 안심될 정도로 인간 그리고 사회의 실상을 말한다. 17세기 영국에 대한 풍자에 현재의 우리가 변함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인간과 사회는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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