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의 폭풍 - 로마 공화정 몰락의 서막
마이크 덩컨 지음, 이은주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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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같은 제목의 역사서다.「폭풍 전의 폭풍」. 어떤 폭풍 전에 무슨 폭풍이 있었단 말인가. 부제에 따르면 책은 ‘로마 공화정 몰락의 서막’을 다룬다. 아우구스투스의 등극을 제정 시작으로 볼 때 공화정 몰락이란 그 바로 전인 카이사르의 시기를 말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공화정을 침몰시킨 카이사르의 폭풍이 일기 이전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로마가 카르타고를 무너뜨리고 세계 제패의 막을 연 기원전 146년부터 카이사르 직전의 로마 일인자 술라의 죽음(기원전 78년)까지다.

 

로마사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제정의 화려한 모습과 건축물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공화정 시기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공화정 시기의 사건이라면 한니발로 유명한 포에니 전쟁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까. 저자는 공화정 말기, 그것도 익숙한 이름 카이사르가 등장하기도 전의 기간에 관심을 가진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특히 이 시기는 현대 공화주의 체제의 취약성을 의심하며 카이사르 세력의 부상을 경고의 메시지로 바라보는 지금의 우리에게 더없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애초에 로마 공화정이 재앙 직전 상황까지 가게 된 과정을 다룬 저작물은 훨씬 적다. 아마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 사회와 관련이 깊은 문제일 텐데 말이다. p.24-25

 

저자는 카이사르의 공화정 파괴가 한 사람의 결단으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앞선 한 세기 동안 진행돼 온 방향이라고 말한다. 작금의 미국을 로마사 연대표에 대입해본다면 ‘위대한 정복 전쟁과 카이사르의 부상 사이 어디쯤’이라고 말하며 이 시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성을 밝힌다.

 

카르타고 멸망과 카이사르 등장, 그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고 누가 주역일까. 우선은 3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고 카르타고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린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흔히 불타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로마의 미래를 예견했다는 시적인 장면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책에서는 전쟁 이후 그의 정치 인생을 서술하고 그에 대한 색다른 평가를 제시한다.

 

그의 경력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암시하고 있었지만, 정작 이이밀리아누스 본인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떠났다. p.113

 

아이밀리아누스는 민회의 군중심리를 이용해 정치적 장애를 제거하는 기술, 사적으로 군단을 모집하는 선례를 남기면서 이후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반면 권력이 평민에게로 기우는 시점에 원로원의 기호에 맞는 주장을 펼쳤다. 민중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 자신이 자신의 불찰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저자는 이처럼 공화정이 내리막을 달리는 시기의 인물들 면면을 새롭게 보여준다. 그라쿠스 형제, 마리우스, 술라가 이 폭풍의 주인공이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서 술라까지 차례로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또 밀려났다. 민중을 위한 혁명가로 알려진 그라쿠스 형제가 혁명에 목을 매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로마 군단을 징집제에서 모병제로 바꾼 군사개혁가 마리우스는 어떻게 로마를 끝장낼 뻔 했는가. 잔혹한 종신독재관 술라가 돌아가자고 주장한 공화정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책 속의 까만 글자로만 존재하던 인물이 순간순간 죽음을 내건 판단에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기뻐하는 생명체로 느껴진다.

 

‘모스 마이오룸 mos maiorum'은 ’선조들의 관습‘을 말한다. 공화정 시기의 로마인은 조상대대로 지켜져 내려온 불문율을 지켰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율, 전통, 상호 기대를 삶에서 지켰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통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공화정 몰락의 한 축으로 보고 있다. 집정관은 연임할 수 없으며 한 번 집정관에 당선됐던 사람은 일정 기간 다시 선거에 후보고 나설 수 없다는 규정, 로마 시내의 신성한 구역에는 무기를 갖고 들어갈 수 없다던가, 신전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공화정 후기로 갈 수록 무너진다. 민중의 호응에 힘입어 집정관과 호민관이 연임하고 중무장 군인이 신전에서 거침없이 살상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아셀리오는 법무관 재임 당시 신에게 헌주를 따르던 중에, 그러한 의식의 관례에 따라 금박을 입힌 성스러운 제의를 입은 채로……한창 희생제물을 바치다가 살육되었다.” 그 무엇도 더는 신성시되지 않았다. p.315

 

술라는 1개 군단 전체를 로마의 신성한 경계선인 포메리움 너머로 이끌었다. 원래 신성경계선 안에서는 어떤 시민도 무기를 지닐 수 없었다. 모스 마이오룸 취후의 전선이자 가장 신성한 경계선 중 하나가 무너진 것이다. p.340

 

더 이상 신이 인간을 돌보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신의 선의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힘의 제재가 사라진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악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행동은 큰 권력을 지닌 관직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그런 자리는 사람이원래 가지고 있던 성격을 바꾸어 변덕스럽고 허영심 많고 잔인하게 만든다고 여겨졌다. p.406

 

반대파에 대한 처절한 살육 끝에 전례가 없는 종신 독재관직에 오른 술라는 공화정 복구를 시도했다. 술라는 이미 홀로 누리는 권력의 가능성이 확인된 후, 민중이 자신들의 힘을 깨달은 후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으로 회귀가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개혁을 밀어붙이는 능력은 탁월하나 시대를 보는 시야는 좁았던 탓이다.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자신이 공화정에 새 생명을 붕어넣었다고 믿으면서 죽었다. 그러나 일견 새 시대의 여명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상 로마 공화정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 순간에 비친 빛이었다. p.446

 

마이크 덩컨의「폭풍 전의 폭풍」은 공화정 말기를 정리하면서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전문 학자가 아닌 덕에 쉬운 문장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추천사에서도 언급하고 있다시피 무엇보다 번역을 칭찬하고 싶다.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SPQR」(메리 비어드)의 번역에 실망해 현대 작가가 쓴 로마사 번역물에 대해 망설였었는데 이 책은 그런 우려를 깨끗이 날려줬다.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번역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걸리는데 없는 번역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몸젠의 로마사>와 <로마제국 쇠망사> 사이에 뚫린 구명을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 적절한 시기에 좋은 책을 만나게 된 행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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