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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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억압적 가정 속 사춘기 소녀의 삶’을 초과하는 이야기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우리나라에「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와 「엄마는 페미니스트」같은 비소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작가의 재능은 소설 쪽으로 더 기운 듯하다. 2003년 발표한 첫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그 예다. 이 책은 얼핏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란 소녀 캄빌리의 성장기로 보인다. 그러나 캄빌리가 통과하는 시간 속에는 쿠데타라는 국가적 사태와 군부 통치하의 혼란스런 사회상, 종교와 전통의 문제까지 섞여있다. 작가는 한 권의 책, 소녀의 이야기에 이 모든 상황을 조화롭게 버무려 넣었다. 심지어 나이지리아 토착어와 토속 음식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는 열여섯 살 소녀 캄빌리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아이지만 2등 성적표를 받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아버지 때문이다. 캄빌리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기업가로 사회적 명망이 있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독실한 사람이다. 그를 설명하는 구절이 끝이 없다. 미사 설교에서 신부가 교황님 다음으로 언급하는 사람, 신실한 신자, 겸손함의 중요함을 아는 사람, 올바른 정치 의식을 지닌 사람. 아버지는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쿠데타 세력을 비판하는 일간지 발행인이기도 하다. 덕분에 《앰네스티 월드》에서 수여하는 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 이면에 가족을 공포에 떨게 하는 아버지가 숨어 있다. 그는 가족을 폭행해야 하는 의무를 지녔다고 생각한 것일까. 딸이 생리통 진통제를 먹기 위해 금식을 어겼을 때 혁대로 때린다. 이교도인 할아버지와 한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끓는 물에 발을 담그는 벌을 준다. 영성체 수업에서 1등하지 못한 아들의 왼손 손가락을 불구로 만든다. 폭행은 아내에게도 예외가 없다. 캄빌리와 자자의 어머니 비어트리스는 일상적인 폭력을 말없이 견뎠다. 부은 눈이 너무 익은 아보카도처럼 검푸르러지고 이마에 지그재그형 흉터가 생기고 유산이 계속됐다. 가족의 피를 흘리는 폭행 후 유진 아치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신께 기도한다. 그가 생각한 신의 보호, 구원, 공정함의 정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는 이십 분 동안 우리를 사악한 자들과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나이지리아와 나이지리아를 다스리는 불신자들을 구원해 달라고, 우리가 계속 공정함 속에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p.81

 

아버지 유진 아치케가 어떤 신을 믿는 것일까. 그는 스스로 신의 대리자가 되어 신의 이름으로라면 가족을 학대하는 일도 불사할 수 있게 된 걸까.

 

너는 내가 왜 그렇게 너랑 오빠한테 최고만 주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니?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느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야. 하느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p.44

 

종교와 억압에 대한 적절한 은유는 다른 아이의 입에서 나온다. 종교는 억압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유진 아치케는 그 사실을 온 생애를 통해 실현했다.

 

“있잖아요, 신부님, 그건 옥파 만드는 거랑 비슷해요.”……“밤바라땅콩 가루랑 야자유를 섞어서 몇시간 동안 쪄요. 그런 다음에 거기서 밤바라땅콩 가루만 빼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은 야자유만 빼낼 수 있을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아마디 신부가 물었다.

“종교와 억압요.” 오비오라가 말했다. p.214

 

남매의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가톨릭의 하느님은 자식이 부모를 존중하는 법을 무시하는 종교다. 조상을 존중하는 일을 우상숭배라며 금지시키면서도 성직자에게는 무릎을 꿇고 손에 입맞추게 하는 모순덩어리다.

 

당신들이 숭배하는 신은 어디 있소?……그러면 살해당한 사람, 선교관 밖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누구요? 그는 그분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아들과 아버지가 동등하다더군. 그때 그 백인이 미쳤다는 걸 알았지.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하다고? 투피아! 모르겠니? 그래서 유진이 나를 무시할 수 있는 거야. 우리가 동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p.110

 

가족뿐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의 사람들에게 신이 된 유진에게 올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여동생 이페오마뿐이다. 이페오마는 남매를 자신의 집에 불러와 순종만이 절대가치가 아님을 가르친다. 또 전통과 가톨릭이 평화롭게 공존할 가능성에 대해 알려준다.

 

“오빠는 하느님 행세를 그만둬야 해요. 하느님은 다 큰 어른이니까 당신 일은 당신이 하실 수 있어요. 아버지가 조상님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벌하실 거라면 오빠가 아니라 하느님이 벌하시게 놔두란 말이에요.” p.124

 

“저항은 때때로 좋은 것릴 수도 있어.”……“저항은 대마초 같은 거거든. 제대로만 쓰면 나쁜 게 아니야.” p.182

 

……파파은누쿠(할아버지)는 이교도가 아니라 전통주의자라고, 낯선 것이 익숙한 것만큼 좋을 때도 있다고, 파파은누쿠가 아침마다 하는 이투은주-자신이 무죄함을 선언하는 의식-는 우리가 하는 묵주 기도와 같다고 말했다. pp.206-207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허락한 말, 아버지를 기쁘게 할 말만을 할 수 있었던 아이들은 고모네 집이 있는 은수카에 머물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뜬다. 웃고 싶을 때 웃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이 목까지 차오르지만 입을 뗄 수 없었던 아이들은 웃고 말할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들의 상황이 비정상이었음을 아버지의 그늘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 몸만 큰 어린 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남매는 ‘입술보다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가 더 많았던 세월’을 건너뛴다.

 

그때 나는 이페오마 고모도 사촌들에게 똑같이 해 왔음을 깨달았다. 엄마가 자식한테 어떤 식으로 말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통해 그 애들이 뛰어넘어야 할 목표를 점점 더 높혔다. 아이들이 반드시 막대를 넘으리라 믿으면서 항상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빠와 내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스스로 막대를 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넘은 게 아니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넘었다. p.274

 

아이가 자라기 위해선 믿음이 필요했다. 두려움보다는 믿음.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마음 말이다. 은수카의 아마디 신부는 캄빌리에게 그런 믿음의 말을 들려준다.

 

“연기 못해요. 해 본 적 없어요.”

“이제부터 해 보면 되지.”……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할수 있어. 캄빌리.” p.290

 

오빠 자자는 은수카의 고모댁 정원에서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가져다 앞마당에 심는다. 그 전 앞마당의 모든 히비스커스는 빨간 색이었다. 자유를 의미하는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자신의 집에서 잘 자라나길 바라며 스스로 원하는 것을 고민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p.27

 

캄빌리는 일련의 사건 이후 아마디 신부에게서 마음의 의지처를 찾는다. 소녀는 자라고 아버지의 말 대신 ‘아마디 신부가 말하는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말했고 그의 말이 참이기 때문이다.’(p.360) 캄빌리에게 나타난 또다른 신 또는 신의 대리자가 전과는 다른 존재이길 바란다. 더 나은 결론은 캄빌리 자신이 스스로 우뚝서는 일이겠지만 저자는 그녀를 홀로두지 않았다. 하지만 절반보다 나은 성공이다.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 나이지리아의 소녀가 겪는 이야기는 이질적인 한편 우리의 지나온 시간과 묘하게 닮아있어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캄빌리의 성장기에서 눈을 떼기 어려운 동시에 이야기가 좀 더 계속 되길 바라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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