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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
에느 리일 지음, 이승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쓸쓸하고 아름답다. 매서운 바람이 떠오르는 북구의 고립된 한 섬에서 한 가족이 산다. 아빠, 엄마, 나 그리고 카알. 나와 카알은 쌍둥이 남매다. 나는 여자아이치곤 힘이 센 아이 리우고 카알은 말이 없는 남자아이다. 남매의 할머니는 아빠의 손에 살해된다. 그러니까 아들이 어머니의 숨을 끊어 놓은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이 아이의 시점에서 담담하게 서술된다.
아빠가 할머니를 살해하던 날, 하얀 방은 완전 깜깜했다. 난 거기 있었다. 카알도 함께 있었지만 누구도 카알이 거기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p.5
이 가족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설은 리우의 가족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의 모습으로 지내게 되었는지를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보여준다. 리우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할머니가 살해되는 날까지. 그리고 그 가족이 어떤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지까지. 이야기의 중심은 리우의 아빠 옌스 호더다.
작가 에느 리일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선 「송진」이 첫 작품이다. 이 소설로 작가는 2016년 스칸디나비아 최고의 서스펜스/범죄소설에 수여하는 글래스키상을 받았다. 「송진」은 덴마크에서 2015년에 출간됐고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다. 자국내 첫 작품인 「리셀레예에서 온 도살자」(2013)를 발표했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실력을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작가의 이전 작품을 본 일이 없는 나에겐 그저 낯선 작가일 뿐이었다.
「송진」은 기대 이상의 스토리텔링을 보여줬다. 충격적인 도입뿐 아니라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에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한 마지막 순간도 흥미로웠다. 서스펜스/범죄소설 분야의 작품임에도, 심지어 같은 분야의 유력한 상까지 수상했음에도 작가의 문장은 부드러운 서정이 담겼다. 작품의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는 ‘송진’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홀데트섬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건 신선한 송진 냄새다. 코를 간질이는 재미난 느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끈적끈적한 느낌의 송진. 아빠는 차분한 목소리로 나무 안에서 나오는 수액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송진이라는 건 신기한 거라고. 외부의 자극이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상처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작은 크기의 죽은 동물들을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한다고 했다.……송진은 나무들을 치유하는 보호자니까. 나무들은 내 친구들이었다. pp.15-16
옌스 호더는 일생을 통해 느꼈던 결핍을 물건을 모으는 일로 보상받고자 한다. 가까운 섬의 이웃들과도 점차 연락을 끊고 자기 가족들만의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 자신이 쌓아 만든 세상을 외부로부터 차단하고 시간조차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이. 옌스 작업실의 모래시계는 ‘모래가 양쪽에 정확히 반반씩 나눠진 채로’ ‘먼지와 기억 속에’ 잊혀져 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형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아들로부터. 그를 떠난 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도 그의 곁을 떠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p.106
딸에게 아빠의 세상을 넘어서는 것은 무엇도 가르치지 않고 싶어했지만 리우는 모래시계안의 모래가 흐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 아이다. 아빠 옌스의 행동을 살피고 그가 한 말들을 곰곰이 되씹어본다. 리우는 숲 속에서 스스로 지혜를 터득하는 아이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번 떠난 것은 무엇이든 되돌릴 수 없다고 믿는 아빠, 그리고 숲의 순환처럼 모든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딸이 함께하는 시간은 처음부터 파국을 예고한다.
그날 이후 숲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색이 다른 색을 대신한다.……어둠이 빛을 다신하고, 빛이 어둠을 대신하는 것이다. p.17
아빠 옌스가 집과 집 주변에 물건을 쌓아 자신만의 장막을 건설하는 동안 엄마 마리아는 자신의 몸 내부에 움직일 수없는 성을 만든다. 먹고 또 먹는 동안 마리아의 몸은 집의 일부가 된다. 마리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옌스를 사랑했다. 그와 함께 한 고통의 세월 때문인지 변해가는 옌스를 이해하고 언젠가 자신에게 끼칠 해를 고스란히 떠안고자 한다. 하지만 딸아이만은 지키고 싶어한다. 목소리마저 잃어가는 마리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딸을 위한 도움을 요청한다. 옌스와 마리아는 자신들만의 천국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을까. 사랑하지만 자신을 옭아매는 부모와의 삶에서 리우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작가가 묘사하는 저장강박의 현장은 그야말로 숨이 막힌다. 사용하기 위해 물건을 곁에 두는 게 아니다. 오직 그곳에 두기 위해 물건을 모은다. 언젠가 꼭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핑계로 물건이 집의 주인이 되고 결국은 집을 집어 삼킨다. 물건을 모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물의 마음에 연민이 일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 쓰레기 속으로 함께 매몰돼 가는 그 가족의 처지가 슬프다.
결국 아이를 구하는 것은 작은 관심이다. 더럽고 구질구질하다고 눈 돌려버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누군가를 지켜보는 눈길 말이다. 작가 에느 리일은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이의 삶을 묘사한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피폐해지는지 도덕성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을 가족 간 살인을 다룬 범죄소설로만 보기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폭이 넓다. 자연에 대한 이야기, 부모자식간의 애증에 대한 이야기, 험난한 가정 환경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 아이의 생존기까지 이야기의 겹이 두껍다.
숨 가쁜 사건의 연쇄로 가득 찬 범죄소설과는 다른 서스펜스를 느끼고 싶은 범죄물의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