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가 돌아왔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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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J. 튜더가 돌아왔다. 작년 2018년 여름 한철을 시원하게 또 의미있게 보내게 해줬던 작가다. 선홍색이 난무하는 책을 두려워하던 독서모임 회원들과 함께 작가의 전작 「초크맨」을 읽고 토론을 했었다. 책 소개글만으로도 난색을 표하던 분들의 독서후기는 호평에 가까웠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청소년의 심리 등 무서움을 견디며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는 의견이었다 이렇게 강렬한 데뷔작을 쓴 작가의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다. 그 작가의 책이 1년만에 출간되었다.

 

끔찍한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엄마가 자살 전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내 아들이 아니야”. 그 직후 주인공이 사건이 일어난 마을로 돌아온다.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탄광마을 안힐로. 문제의 사건 때문에 공석이 된 안힐 고등학교의 영어선생 자리에 지원하기 위해서다. 주인공 조지프 손은 화려한 추천서와 이력서를 갖춘 능력있는 선생으로 보인다. 그러나 겉만 보고는 모르는 거다.

 

근사한 집, 근사한 차, 근사한 옷, 하지만 절대 모르는 법이지. 그 속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p.12

아빠와 동생이 자동차 사고로 죽고, 그 10년 후 엄마마저 병으로 저세상으로 간 뒤 주인공은 마을을 떠났었다. 조지프 손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안힐에서의 망가진 자신을 지우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중년이 된 그는 발걸음을 그리 멀리 떼지 못한 듯싶다.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경력까지 말아먹은 상태니 말이다.

 

나를 붙잡고 있는 관계, 나를 규정하는 사람들, 나를 어떤 아이덴티티에 묶어놓는 익숙한 풍경과 일상에서 아주 멀찌감치 도망치면 적어도 당분간은 내 자신에게서 쉽사리 벗어날 수 있다. 자아는 구조물에 불과하다. 얼마든지 해체하고 다시 만들고 새로운 나를 으리으리하게 꾸밀 수 있다.
돌아가지만 않으면 된다. pp.108-109

도박빚에 쫒겨 사기를 쳐서라도 돈을 마련해야 하는 조. 그가 고향 안힐을 떠올린 건 발신인을 알 수 없는 메일이었다. “(과거의) 그 사태가 다시 벌어지고 있어”(p.36)라고 적힌 메일을 확인한 주인공은 과거 속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굳힌다. 열 다섯 살 때 자신과 동생이 학교를 휘젖는 일당에 연루돼 발생한 사건을 빌미로 빚을 해결하려는 생각에서.

 

저자가 그리는 학교의 생태계는 야생의 정글보다 잔인하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철저히 구현된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과거 강자의 자녀가 현재도 강자의 처세를 그대로 물려받아 약한 학생들을 괴롭힌다. 소설 속 안힐 아카데미와 비슷한 분위기의 학교를 다녔던 저자는 극중 인물의 입을 빌어 학교의 그리고 교사의 역할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학교의 모습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부모의 입장이라면 숙고할 만한 대목이었다.

 

가르친다는 건 성적표와 교육청 평가가 다가 아이잖아요. 아이들을 좀 더 쓸 만하고 둥글둥글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게, 10대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도와야죠. 이 시기에 아이들을 지키지 못하면 영영 지킬 수 없으니까요. p.303

빚을 받으려는 자가 고용한 킬러는 조의 숨통을 시시각각 조여 온다. 동생 애니 실종의 원인을 제공한 친구 스티븐은 아빠와 동생의 죽음에 얽힌 조의 기억을 되살리며 그에게서 빠져나가려 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사건은 파국을 향해간다.

 

C. J. 튜더는 이번 책에서 현실을 뛰어 넘는 현상과 공간을 이야기에 끌어들이려고 했다. 어느날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킨 듯 변하는 아이들을 탄광마을의 특정한 공간과 연결시키려 했다. 과학적 논리로는 설명 불가능한 심령미스터리라고나 할까. 이 지점에서 나의 독서가 헛발을 디뎠다. 에필로그에서는 얼마간 황당함을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는내내 애니와 다른 아이들의 변화를 논리적 문제로만 생각했던 탓이다. 마지막에 붙은 역자 해설을 보면서 나의 착각을 깨달았다. 이 책은 작가가 신비주의적 요소를 바탕에 두고 쓴 것이며 공포 미스터리이고 심리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런 책을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추리소설을 전제하고 읽었으니 저자가 깔아놓을 선로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탈선사고에 준하는 독서가 되고 말았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를 충분이 말했다. 이것들을 복선으로만 생각하고 무시한 내 불찰이다. 덕분이 심리학책을 과학책인 줄 알고 읽을 때 느낄 법한 혼란을 경험했다.

 

이곳은 누가 소유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렇게 착각하도록 내버려둘지 몰랐다. 심지어 그렇게 착각해주길 바랄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곳은 수법이었다. 이곳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끌어들였다. 그런 식으로 소유했다. p.324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p.325

 

이 세상의 어떤 것들-아름답고 완벽한 것들-은 다시 만들면 반드시 망가지게 되어 있다. p.347

 

우리는 누구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삶을 숙명이다. 심연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도록 계속 바쁘게 생활하며 신선을 피하는 것. 그걸 들여다보았다가는 광기에 휩싸일 것이기에. p.421

이번 책은 여러모로 전작과 유사했다. 주인공을 고향으로 이끄는 미스테리한 문자 메시지, 주인공의 신상과 분위기, 특정 문제에 얽힌 학생들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조. 이런 것들이 전형적인 스릴러의 짜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의 그늘을 벗어나기 싫었던 걸까. 또는 작가가 경험한 유년시절의 끝나지 않은 변주일까.

 

「애니가 돌아왔다」는 전작 「초크맨」이 출간되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성실한 작가다. 다음 작품도 이미 탈고했다고 한다. 앞선 두 작품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사건을 서술했던 바와 달리 후속작은 여러 명의 삼인칭 시점을 택했다고 한다. 바라건대 자기복제의 늪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야기꾼으로 다시 만나게 되길.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금발 남자아이의 말을 작가에게 돌린다.

 

“너는 다시 오게 될거야.” 남자아이가 말했다. “우리가 장담해.”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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