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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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검은 개와 맞닥뜨린다. 염소로 착각할 만큼 크고 온 몸이 검은 개 두 마리. 인적이 없는 메마른 고지대의 오솔길에서 홀로 만난 커다란 검은 짐승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하지만 준의 공포를 현실화 한 것은 검은 개의 물리적 실체가 아니었다. 거대한 몸집의 그 짐승이 어떤 목적으로 양육되었는지를 알게 된 그 순간, 준은 악의 현신을 깨닫는다.

「검은 개」는 이언 매큐언이 1992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장편소설이다.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대표작「속죄」가 나오기 10년 전에 출판된 작품이다. 「속죄」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개개인의 미약함 그리고 누군가의 무심함이 타인의 생을 얼마나 왜곡시킬 수 있는가를 그렸다. 「검은 개」에도 세계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이어진다. 이 책에서는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보는 시선의 문제를 다룬다.

준과 버나드 트리메인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만나 결혼한 부부다. 이들 부부의 딸 제인의 남편 제러미가 소설의 화자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제러미는 부모 세대의 사람들에게 남다른 친밀감을 가진 이다. 부모와 유대감이 거의 없는 제인의 반대에도 제러미는 장인, 장모의 삶을 깊이 파고든다. 준과 버나드는 결혼 직후 영국과 프랑스로 헤어져 각자 삶의 터전을 일군다.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신뢰하지도 않는다. 제러미는 요양원에 입원한 준과 대화하면서 장인, 장모의 삶을 돌아본다. 준이 간직한 사진에서 한때 서로에게 기대어 웃고 있던 젊은 그들이 어느 순간 어떤 이유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상대로 여기게 되었는지를.

인간 만사를 주관하며 주기적으로 개인과 국가의 삶을 파괴하는 사악한 힘과 선하고 전능한 영성이 공존함을 믿는 준의 시각이다.

내면세계의 혁명 없이-아무리 느리다고 해도-거창한 설계가 다 무슨 소용이야.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p.244

재능있는 곤충학자로 평생 과학의 제한적인 확실성과 당당함을 굳게 믿었던 버나드의 시각이다.

내면세계라. 사위, 어디 배곯으면서 내면세계 한번 찾아보라지. 아니면 깨끗한 물 없이 아니면 단칸방에 일고여덟 명이 기거하면서 말이야. ……이 복작거리는 작은 지구에서 세상일이 돌아가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사상이 필요해. 그것도 아주 죽여주는 사상이! p.245

두 사람은 ‘각각 합리주의자와 신비주의자, 인민위원과 요기, 활동가와 기권자, 과학자와 직관론자’로서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현상을 보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각자 개인의 몫이다.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세계를 해석할 것인가. 준의 눈으로? 또는 버나드의 눈으로?

저자는 사위 제러미의 입을 빌어 말한다. 세상은 세계사와 개인사가 서로 작용하고 결합하면서 이뤄지는 거라고. ‘합리적인 사고와 영적인 통찰은 별개의 영역이며 두 가지가 반목한다고 주장해봐야 소용없는 짓’이라고 말이다. 제러미는 어떤 견해의 쪽에 발을 딛더라도 삶을 변화시키는 가능성은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서로의 세계를 알고는 있었으면서도 먼저 말을 걸고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못한 준과 버나드는 사랑의 힘에 좀 더 기댔어야 했을까.

저자는 또한 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드러난 악에 대해 경고한다. 경계하는 마음이 느슨해지는 순간을 틈타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낼 검은 개와 같은 사악함. 희미한 자국처럼 남아있다가도 언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유령같은 악의 존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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