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수문장
권문현 지음 / 싱긋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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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일을 오래 한 것이 자랑이 될 수 있을까?>

 

현재 콘래드 서울호텔 지배인으로 8년째 근무중인 권문현 선생님은 이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36년간 근무하고 2013년에 정년퇴직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한 방송사에서는 퇴임하는 그의 마지막 날을 프로그램에 담았는데, 방송 시작의 내래이션을 본인이 맡았다. “나는 도어맨이다. 어떤 이들은 이 직업을 감정 노동자라고 하지만 항상 웃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 행복했던 36년간의 시간 오늘 그 마침표를 찍으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평생 해왔던 일을 마무리하는 몇 마디의 말을 꺼낸다면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들까 상상하게 되었다.

 

이 책은 지난 44년간의 일기이다. 호텔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 의전이 모든 것이었던 시절부터 컨시어지 서비스와 호캉스의 전성시대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경험과 기억, 소회를 담고 있다. 지금은 호텔리어라는 직업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만, 이 직업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시절부터 그는 한결 같은 자세로 일해 왔음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일하는 장소도 더울 때 가장 덥고 추울 때 가장 추운 곳이다. 고객을 제일 먼저 만나고 제일 마지막에 배웅하지만 고객 입장에서 대개는 큰 비중으로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회적인 인지도가 높으나 낮으나, 그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누군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스스로의 역할과 책임을 바라봤던 것 같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존중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진심이 담긴 디테일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 사람에 여러 가지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오늘날, 한 가지 일을 오래한 것이 자랑이 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일기를 읽으며 마음을 다해 한 자리를 오랜 세월 지켰을 때 누구나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젠 호텔 전시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물건들이나 옛날 이야기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관행들, 그리고 그것들의 변천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게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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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합치 - 예술과 실존의 근원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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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전에 A교수님께 들은 경험담이 도움이 될 것 같다. A교수님이 처음 교수로 임용되었을 당시, 스스로를 매우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던 노교수님이 계셨다고 한다. 당신이 젊었을 적에 불합리하다고 느꼈던 관행들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신경써서 행동하셨는데, 문제는 그 행동들이 그 예전에는 진보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지언정 A교수님 세대에서는 더 이상 진보적인 행동으로 평가하기엔 이미 구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스스로는 그 변화에 적응해가는 것 같아도 여전히 뒤쳐짐을 피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하셨다.

 

산다는 것은 무언가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현재 상태가 사회 규범이라든지 타자와의 관계,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합치하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일반적인 생각은 두 가지를 간과했다고 말한다. 그 하나가 바로 “현재의 순간은 그 흐름에서 포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빠져나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소개한 이야기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현재에 합치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지만, 동시성은 결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다. 마치 현재 발을 담근 강물이 이미 저만치 흘러간 것처럼. 이렇게 본다면 살아 있다는 것에는 합치가 아닌 ‘탈합치’의 원리가 끊임없이 작동한다. 만일 이전의 상태가 지속될 경우(합치),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삶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죽음으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 탈합치는 현재 느끼는 상태와의 합치 불가능성으로 인해 스스로를 ‘도약 상태’ 속에 유지하는 것이며, 삶의 근본적인 작동방식을 ‘합치에서 이탈함’으로 이해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탈합치적인 사례들을 예술과 실존, 성경, 동서양의 철학 등에서 찾는다. 피카소의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그림과 캔버스가 합치하지 않고 어긋나 있는 작품이다. 형태와 비율, 원근법, 단일한 관점, 재현 등을 해체하려 했던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탈합치적 방법론을 찾는다. 또한 에덴동산에서 합치하는 삶을 살던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당함으로써 비로소 실존하기 시작한 데에서 탈합치 개념을 설명하기도 한다. ‘실존하다(exister)’란 ‘바깥에 서다(ex-sistere)’라는 뜻으로, 기존의 세계에 대한 적응의 바깥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밖에 실천 영역에서 탈합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역자는 해제를 통해 정치 영역에서의 탈합치를 소개한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는 어떨까. 처음 소개한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스스로 현재에 합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무의식중에 탈합치 관념을 이미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사회규범들, 이를테면 인권이나 젠더 의식에 스스로가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작동하는 탈합치를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다. 하물며 스스로 합치 상태에 있다고 ‘의식’하는 사람들, 마치 물과 공기처럼 나에게 주어진 것이 당연하다는 ‘의식’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겠는가. 참고로 저자는 ‘정신’과 ‘의식’을 분리하여 대립시키는데, 이 점도 주의깊게 볼 부분이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거리와 가능성을 안겨주는 책이다.



 

탈합치라는 개념의 번역 과정에도 재미난 점이 있다. 저자는 중국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거상합(去相合)’을 제안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서로 합쳐진 상태를 떠나다/벗어나다’ 정도의 의미인데, 역자는 우리말 용법에서는 너무 벗어난다고 판단하였다고 한다. 직관적으로도 ‘탈합치’가 의미내용을 담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문도 학문이지만, 책 제목을 거상합으로 지어 출간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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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산업 키워드로 본 착한 제도 나쁜 규제
하상도 지음 / 좋은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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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장 안전하지만 가장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식품 혹은 먹거리는 우리 생존과 가장 밀착된 문제이다. TV를 보면 어떤 때는 세상에 안심하고 먹을 것이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건강을 위해 먹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식품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얼마나 알고 있을까. 식품의 안전이 그토록 불안한 걸까, 그 많은 기능성 식품들이 정말 우리 몸에 영향을 주는 걸까.




식품정책은 크게 식품안전 정책과 식품산업 진흥 정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책의 구성도 제1부에서 산업 진흥과 규제를 다루고 있고, 제2부에서는 안전 이슈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약간의 분량으로 미디어 측면을 다룬다. 일단 제목을 보면 약간의 의문은 생긴다. 제도는 착하고 규제는 나쁜 걸까. 아니면 착한 제도와 나쁜 제도, 착한 규제와 나쁜 규제를 모두 포괄한 의미일까. 법학적 관점에서는 규제에 관해 깊이 생각할거리가 있지만, 저자는 식품공학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제목에 관해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 선해하며 넘어가자. 아무튼 어떤 산업과 정책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식품 분야에서도 규제는 중요한 문제이다.







구성을 크게 산업 (규제와) 진흥 및 안전으로 나누었지만, 사실 두 문제는 중첩적인 측면도 많기 때문에 완전히 분리해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일단 산업 규제와 진흥 이슈를 살펴보면 대략 ‘표시제도’와 ‘인증제도’, ‘영양정책’ 정도로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표시제도는 식품정책에서도 매우 비중이 큰 제도인데, 여기에는 원산지 표시 문제나 유통기한 표시, GMO 표시, 식품첨가물 표시 등의 굵직한 이슈들이 자리잡고 있다. 인증제도 관련해서는 요즘 마스터키가 된 ‘해썹(HACCP)'이 매우 중요한 이슈다. 영양정책 관련해서는 나트륨과 카페인, 설탕세(Sugar tax) 같은 이슈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국가가 제도로써 규제할 부분인가 의문이 든다. 그밖에 요즘 각광 받고 있는 공유주방과 같은 신산업과 샌드박스, 푸드트럭, 중소기업 적합업종제 등의 떠오르는 이슈들이 있다.




다음 식품 안전 제도를 살펴보자. 최근 일본 수산물에 대한 방사능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였다. 국가 사이의 식품의 이동은 비할 데 없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수입식품 안전 관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다음, 여기에서도 GMO나 식품첨가물 이슈가 역시나 중요하다. 특히 GMO는 국가마다 규제 기준이 다르고, 과학계와 산업계, 시민단체, 일반 국민 사이의 시각 차이가 매우 뚜렷해서 매우 어지러운 국면에 있다. 다음, 최근에는 식중독 등의 문제가 옛날에 비해 줄어들고는 있지만, 여전히 식중독과 농약/중금속, 이물질 따위의 이슈도 꾸준히 다뤄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최근 우리 삶과 더 없이 밀접한 이슈 가운데 하나가 건강기능식품과 플라스틱 포장재 문제가 아닐까. 건강기능식품의 성장 속도는 매우 빠르다고 하는데, 우리는 건강식품이 제도적으로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잘 이해하고 있는가. 또, 최근 이른바 ‘쓰레기산’으로 더욱 부각된 플라스틱 용기사용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식품법제는 개인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이기도 한데, 이 책은 접근방식이 다를 수는 있지만 식품관련 이슈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에서 기본 소양으로 알 필요가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안전은 그 어디에도 없다. 불안은 미지의 세계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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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1
리처드 턱 지음, 조무원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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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된 철학은 홉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근대의 시작을 홉스로 삼기도 하는데, 사상사가와 정치이론가들 사이에선 최초 ‘근대’ 정치사상가가 홉스냐 마키아벨리냐에 관한 논쟁이 있다고 한다. 철학서나 사상서마다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목차 구성을 살펴보면 대략적으로 저자의 인식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홉스 정치사상의 장점과 단점을 잘 분석한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과 국가사상가로서의 면모에 집중한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사회적 혼란과 통치권의 측면에 집중한 앤서니 케니의 <근대철학>는 마키아벨리 다음에 홉스를 배치했다. 반면, 명시적으로 홉스를 근대의 시작으로 밝힌 앨런 라이언의 <정치사상사>에서는 마키아벨리 앞에 홉스를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의 첫 장을 열고 있다.


이 정도의 인식 차이를 제외하고, 이 책들의 공통점은 국가사상가로서의 홉스와 국가이론으로서의 <리바이어던>을 중심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성서에서 유래하는 괴물 리바이어던’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홉스를 떠올리는 대표적인 표지이다. 해외의 출판시장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홉스에 관한 서적을 검색해보면 그가 1651년에 집필을 끝낸 <리바이어던>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로 이 책이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소개하는 리처드 턱 교수의 <홉스>는 다른 관점에서 홉스를 소환한다. 홉스는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후세에 가장 도외시된 사상가인데, 그 이유는 오늘날 그를 <리바이어던>이라는 단 하나의 저작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은 여러모로 뛰어나지만, 근대 과학을 기반으로 한 홉스의 생각들이 여기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고, 또 홉스도 이 책을 정치 및 도덕 문제에 대한 자신의 주된 저술로 의도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저자의 이런 시각은 마치 오늘날 애덤 스미스를 <국부론>으로 이해하지만, <도덕감정론>을 바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의 사상이 왜곡되고 마는 점과 유사하지 않을까.


이 책은 크게 ‘홉스의 생애’와 ‘홉스의 저작’, ‘홉스에 대한 해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간 분량의 결론이 붙어 있다. <리바이어던>을 중심으로 그의 정치철학 내지 사상을 종적으로 분석하는 책들과 달리, <법의 기초>와 <시민론>을 포함해서(오히려 여기에 비중을 두고) 과학과 윤리, 정치, 종교를 테마로 종합적인 분석과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당대의 정치적·사회적·역사적 배경과 지적 맥락에서 홉스가 직면했던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해법을 도출하였는지를 편견 없이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홉스를 그저 철학사상사의 한 페이지에 소개된 유물이 아닌, 오늘날도 소환할만한 가치가 있는 안내자로서 복원한다. 


“정치사회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다양한 이견은 자유주의를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깊은 신념적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공유하는 확신과 신념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여긴다면, 홉스를 읽을 준비가 된 셈이다.”


교유서가의 첫단추 시리즈는 옥스퍼드대 출판부(OUP)에서 출간되는 ‘Very Short Introductions’ 시리즈에서 번역되고 있다. OUP의 이 시리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특정 주제를 대중에게 간결하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저술되었다. 1995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했는데, 위키백과에서 확인해보면 700권에 육박할 정도로 다양하다. 판형이 작고 가벼워서 이동할 때 읽기에 좋은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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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세계사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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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세계사에 관한 책이 있다. 세계의 역사에는 주제와 시공간의 한계가 없기 때문에, 시중에서는 전쟁과 무기, 도시, 종교, 음식, 동식물, 금은보화, 건축 등 정말 다양한 주제의 세계사를 발견할 수 있다. 특정 시기와 주제의 역사를 다룬 세계사뿐만 아니라, 전 시대와 지역을 다룬 통사로서의 세계사도 다양하다. 지도로 역사 읽기에 특색이 있는 <아틀라스 세계사>라든지, 미국 하버드와 독일 체하베크 출판사가 합작한 <하버드-C.H.베크 세계사>,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윌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 1940년대 이래 서양사 개설서로 꾸준하게 사랑받는 <서양 문명의 역사> 등은 많이 알려진 책들이다. 이 책들 사이에서도 구성 체계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두 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서양'과 '문명' 중심의 서술이다. 물론 <하버드-C.H.베크 세계사>와 같이 비교적 최근에 출간되는 책들은 서양 중심적 세계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책은 기존의 관점을 고수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서양 문명의 역사>의 목차를 살펴보면 가장 전형적인 구성 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 이래 유행하던 세계사는 이른바 4대 문명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세계를 다루고, 서유럽의 팽창과 종교, 문화의 발전에 이어 제국과 식민주의, 세계대전을 거쳐 지구촌으로 끝맺음한다. 


문명의 발상지에서 시작하는 세계사 개관도 무조건 나쁘다고 볼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런 도식화는 항상 접근이 쉽다는, 버리기 정말 아까운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세계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반듯한 계단을 밟고 고층으로 올라가듯이 중심지마다 같은 단계로 나아가는 역사진행 방식이 이해에 효율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 <신세계사>를 저술한 쑨룽지라는 학자는 이 '4대 문명론'을 가리켜 '낡은 개념'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4대 문명론은 '민족주의'의 수요에는 잘 부합하지만, 인류 문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근 고고학에서는 문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쉬운 이해는 분명 선입견과 편견을 만드는 부작용도 일으키는 것 같다. 그래서 최근 트랜드는 기존의 서양중심주의와 문명론적 세계관에서 나아가 인류와 지구, 우주로 확장하는 이른바 '빅 히스토리'로 뻗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이 책, <옥스퍼드 세계사>도 이런 배경과 맥락에서 최근 트랜드에 꼭 맞는 구성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마치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은하계의 관찰자와 같이 인류 역사 전체를 조망하고 세밀하게 묘사한다는 컨셉을 가지고 있다. 물론 실제 은하계의 관찰자라면 진정한 객관적 관찰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목표이기에, 이 책은 폴 세잔의 그림에서와 같이 다중의 시점으로써의 관찰을 시도했다. "이 책은 인간의 다양성과 관련된 주제들, 다양성을 에워싼 이야기들, 다양성을 관통하는 오솔길들을 살펴봄으로써 다양성 전체를 가능한 한 움켜쥐려는 시도다."


이 책은 지구라는 환경 안에서 마치 복잡하게 증대해가는 세포들을 관찰하는 듯하다. 다양하고 복잡한, 그러면서도 순환적인 인류 역사는 삶의 방식들이 어떻게 증식(발산)하고 만나는가(수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그러한 '발산'과 '수렴'이 자연과 기후라는 환경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가속적으로 변하는지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구성체계가 신선하면서도 서술방식은 어렵지 않아 흥미를 가지고 읽을만하다. 무엇보다도 컨셉이 참 멋지지 않은가.


"우주의 망대에 올라선 은하계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사"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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