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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가자고요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6월
평점 :
진인사대천명!
이제 남은 일은 하늘에 맡길 뿐!
마치 랩처럼 들리는 이 한 구절에
깔깔대면서 많이도 웃었다.
뜬금없이 뭐냐고?
촉박한 시간에 마치 미션임파서블의
한 장면을 찍으며 오지랖 여사님이
불을 올리고 난 뒤 외치신 말이다.
백호리 노인회장 김사또님의 아내분인
오지랖 여사님은 건망증으로 돼지고기를
냄비째로 태우게 되자 며느리와 짜고
돼지고기를 읍내에서 새로 사 와서
요리한 뒤 먹게 된다.
밥상에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둘 뿐.
며느리와 오지랖 여사님은 웃겨서
사레들리기를 여러 번... 그것도 모르고
김 사또님은 자기가 추위에 떨다 얻어온 돼지
고기로 오랜만에 집에 온 자식들 맛있게
먹인다며 으쓱으쓱, 잘도 드신다.
읽으면서 어쩜 이렇게도
소설을 맛깔나게 쓰시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은 드물게도
배경이 농촌인 농촌소설이다.
농촌이라고 하면 시골이 생각나고
시골 하면 생각나는 것은 외할머니 댁이다.
(어째서 외할아버지댁이라고 생각이
안 나는 건지는 모르겠다.)
내 또래 중 어렸을 때 시골에 계신
할머니 집에 맡겨져서 자란 친구들
여럿 있을 텐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 당시 외할머니는 흑염소를
키우셨는데 나도 아기면서
흑염소 새끼가 너무 귀엽다고 만지다가
박치기를 당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뒤로 염소를 너무 무서워해서
내가 갈 때마다 할머니는 뒷동산에서
놀던 흑염소를 다 묶어두셔야 했다.
그 외에도 항상 자기 전에 타주시던
분유 맛이 많이 나는 우유,
반찬마다 났던 계피 냄새는 아직도
그립고 생각이 많이 난다.
우리가 화장실 때문에 무서워서
외갓집에 오지 않자 완전 똥고집쟁이인
외 할아버지를 설득해 시골에서 유일하게
좌변기가 있는 집이 되기도 했었다.

<놀러 가자고요>를 읽다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생각난다.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다 이렇게 사셨을 것 같고,
지금도 이렇게 살고들 계실 것 같다.
책 제목이기도 한 <놀러 가자고요>는
오지랖 여사님이 전화를 해서
동네 주민들에게 올해에도
놀러 갈 건지를 물어보는 내용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손주 자랑하는 사람,
아픈 사람을 왜 시키냐고 따지는 사람,
자식들 때문에 못 간다는 사람,
아픈 사람, 그냥 싫은 사람,
안 들린다는 사람, 자식들 사업이 망해서
집이 난리가 난 사람... 어쩜 이렇게
놀러 한번 가기가 쉽지 않은지.
읽으면서도 계속 웃었고 김종광
작가님의 글은 처음 읽어보는데
다른 글들이 궁금할 정도로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진짜 결국 놀러는 갔을지,
우리 어르신들이 공사다망한
일을 제치시고 혹은 아픈 몸을
이기고 버스는 가득 채웠을지
읽고 나서도 무척 궁금해진다.
<놀러 가자고요>는 두 편의 단편
소설과 일곱 편의 범골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가님이 정말 이야기꾼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처럼 이야기마다 주인공이
다른데 어쩜 그렇게 느낌이 다 다르게
글을 쓰시는지 상당히 재밌게 읽었다.
열한 살 꼬마가 주인공인 <장기 호랑이>를
읽으면서는 감정이입해서 노인들이 훈수
두면 나도 같이 짜증 냈고, 삿대질을 하면
나도 마음속으로 같이 삿대질했다. 우리
장기왕의 엔딩이 너무 서글프지만 귀엽게
서글퍼서 더 기억에 남는 이야기였다.
단편 소설 하나하나마다 웃음이
나오고, 무릎을 탁 치고,
정말 허락도 없이 범골 어르신들
일상에 놀러 다녀온 느낌이 많이 든다.
결코 쓸쓸하지도, 기운이 없지도 않은
그곳에 우리 어르신들의 활기찬 에너지,
욕, 재치, 삶의 연륜, 지혜를 맞이하러
우리도 놀러 가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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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또 p.161
선거철의 시끄러움은 도시만의 자랑이
아니었다. 오히려 농촌이 더 시끄러울 수도
있었다. 색깔도 다양한 선거운동 차량이
10분에 한 대꼴로 지나쳐 갔다.
노란색이 트로트에다 '2번'을 넣어 쩌렁쩌렁,
파란색이 댄스곡에다 '1번'을 넣어 오오오오.
하늘색이 스포츠 응원가에다 '3번'을 넣어
둥둥둥둥, 하얀색이 무소속 누구누구를
앞세운 다짜고짜 연설로 뭐라 뭐라...
산후조리 p.217
오늘은 지발 좀 편하게 가보자.
수도꼭지 위에 잔뜩 쟁여놓은
이불들을 하나씩 덮으며 비손한다.
이윽고 드러난 수도꼭지를 돌렸다.
모터 소리가 들리고, 지발, 지발, 옳거니
그래야지, 물이 나오는구나. 모처럼 날이
푹해서 안 얼어 있을 줄 알았어. 고맙구나,
참 고마워. 참 별게 다 고마운 인생이다.
산후조리 p.231
<생활의 달인>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참 별 재주를 다 가지고 산다는걸,
매번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프로가
있다. 내내 감탄하면서도 애처롭기도 했다.
저 재주들이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익힌 건가.
먹고살려고 악착을 부리다 보니 절로
손에 익은 거지.
작가의 말 p.332
변명을 하자면, 내 부모의 인생이
기록되어야만 하는 귀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줄기차게썼다.
내 부모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골에서 한평생 최선을 다한 농부이기에
기록되어야만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이 마치 내 문학적
탐구의 그 모든 것인 양 늘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기회만 닿으면 두 분의
삶을 궁구하려고 했다.
자식 된 자로서 제 부모의 삶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마는,
나는 유독 집착이 심했던 게다.
내가 소설가가 된 것은 어버이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라고 다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