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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전부 잊고 오늘이 첫날이라는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에미코가 말하고 싶었던 '잊는다'는 것은 정말로 기억에서 지우거나 떠오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다'라는 의미였을까. 이쓰오는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가을 단풍이 들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동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고교생 요시카오 이쓰오.
이쓰오는 스스로를 텔레비전 학교 드라마 속의 한 장면에서 초점이 맞지 않는 곳에 비치는 학생처럼 성적도 보통, 이름도 보통, 키도 보통, 얼굴도 보통,
반에서 눈에 띄지도 않고 존재 자체가 희박한 존재라고 여긴다. 즉, 스스로를 시시하고 평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여관을 운영하는 엄마 아빠와 이제는 나이가 들어 경영에서 물러난 할머니. 그리고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남동생 다타로.
학교에서도 친구관계에서도 특별하게 다르거나 어려운 것 뛰어난 것 없이 그냥 평범한.. 그런 아이.
이쓰오는 학교 문화제를 앞두고 문화제 물품 구매하는 일을 맡게 되고 이사온 날 자기집 여관에 묵었던 그리고 지금은 같은 반인 여자아이
기우치 아쓰코와 함께 그 일을 맡게 된다. 별다르게 다를 것 없을 것 같았던 아쓰코에서는 가슴 아픈 비밀이 있고,
이쓰오는 아쓰코의 부탁을 받고 함께 초등학교 때 묻은 타임캡슐을 파내게 되는데..
평범하게 살아와서 특별한 삶을 꿈꾸었는가? 아니면 원치 않게 특별해져서 평범한 삶을, 그냥 무관심해주기를 간절히 바랬는가.
이 책에는 그렇게나 다른 두 아이가 등장한다. 이쓰오는 너무나도 평범한 자신의 환경이 맘에 들지 않아 특별한 무엇인가를 바라고,
아쓰코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과 가난하게 사는 것도 모자라 전학 온후 계속해서 이지메를 당한다.
결국 아쓰코는 견디다 못해 초등학교 때 다같이 하는 타임캡슐 행사에서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 넣는다.
그동안 아쓰코가 어떤 일을 당해왔는지, 어떤 괴로움을 겪었는지, 얼마나 힘들게 버텨왔는지에 대해..
그러나 중학생이 되고, 그들의 괴롭힘이 잠시 소강상태가 되면서 아쓰코는 더 큰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대체 저 아이들이 언제 아쓰코를 다시 괴롭힐 것인가 하는 불안감, 그리고 보이지 않는 비명들, 두려움들.....
그렇게 아쓰코는 나날이 살아 있지만 살아있지 못한 상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도저히 혼자 힘들게 사는 엄마와 어린 여동생에게.. 이지메로 인한 자살.. 이라는 굴레를 씌워주기가 싫었던 아쓰코는
우연히 문화제에서 물품 구입하는 일을 함께 맡게 된 평범한 이쓰오에게 자신의 진짜 목적을 숨기고 타임캡슐의 내용을 바꿔넣는 것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쓰오는 좋은 일을 한다는 기분으로 아쓰코를 돕고...
마침내 사실을 깨닫게 된 이쓰오는 댐을 향해 가고 있는 아쓰코의 뒤를 따라 가게 된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었는데 이쓰오의 할머니의 사연과 아쓰코의 사연이 몹시 닮아 있었던 것 그 외에도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저렇게 관계 속에 실패하고 혼자 외로움을 겪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지만 살아갈 힘이 없을 때에라도
나를 대신해서 무언가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결코 생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도..
글쎄.. 이 이야기 속의 아쓰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아쓰코가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도 짐작이 갔고
평범해보이는 이쓰오가 투덜대는 모습을 볼 때면.. 힘들어봐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면서 책 속 인물에 많이 동화되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가 자신이 진짜 원하던 삶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관점 바꾸기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방학 독서캠프를 준비하면서 관점바꾸기, 몰입하기 등 나를 재발견하는 수업을 준비하고 있는 중인데
미치오 슈스케 작가가 쓴 물의 관도 어쩌면 우리가 험난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투덜댈 때,
나 혼자만 세상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이쓰오가 할머니와 아쓰코를 위해 내놓았던 해답처럼 관점을 조금 바꾼다면..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어쩌면 또 새로운 인생이 내게 처음으로 주어진 것처럼 매일매일 새 기분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23
비 한 방울 한 방울이 위에서 비치는 햇빛과 아래에서 비치는 수면의 빛을 반사해서 자잘한 거울 조각이라도 흩뿌려 놓은 것처럼 보이거든.
p.55
가을바람에서 유황냄새가 느껴졌다.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이 마을은 바람 냄새가 완전히 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계속 살던 사람들은 분명 모를 것이다.
다른 지방의 바람 냄새를 맡았을 때에야 분명 다르다고 느끼리라
새로이 같은 반이 된 아이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고 싫고를 떠나서 다르다는,
애매하지만 본능적인 감각이 그 여자애들의 지루한 일상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여자애들은 아쓰코를 무시하고, 물을 끼얹고,
알몸으로 만들어놓고 때리고, 발길질을 하고, 그 모습을 휴대 전화로 사진을 찍으며 깔깔 웃고, 수고했다면서 침을 뱉은 우유를 먹였다.
p.267
아쓰코와 나눈 대화, 아쓰코의 몸짓, 표정, 그러한 것들이 머릿속에 들어찬 진흙 속에서 맥락 없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p.278
답은 간단하다.
죽기가 무서웠으니까. 싫었으니까.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대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실패할지도 모르는 번거로운 계획을 세워서 일부러 에둘러 가는 길을 택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계획이 실패하기를 바라면서.
괴롭힘은 전보다 더 잔혹해졌다. 이제 더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도 역시 살고 싶었다.
p.324
"도롱이 벌레는... 사람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끔 한단다."
"사람하고 비슷하다고요?"
"도롱이를 보고 모두 도롱이벌레라고 부르지 않느냐. 도롱이를 보면 모두 도롱이벌레라고 불러. 실은 안에 든 까만 애벌레가 도롱이벌레인데."
"그게 왜 사람이랑 닮았다는 건가요?"
"그도 그런게, 사람도 모두 밖에 나와 있는 부분만 보지 않니. 진짜 알맹이는 보지도 않고 밖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믿어 버리지."
p.330
아쓰코와 할머니가 자신들의 OO에 뭘 맡겼는지 이쓰오는 모른다. 자신이 OO에 뭘 맡겨서 댐 호수에 가라앉히는지도 두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 자신만 알고 있으면 된다. OO을 들어올려 철책 너머로 넘겼다. 신호는 하지 않았지만, 철책을 넘기는 타이밍도,
각자가 OO에서 두 손을 떼는 타이밍도 똑같았다.
p.349
에미코가 이쓰오에게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한 그 말.
에미코가 말하고 싶었던 '잊는다'는 것은 정말로 기억에서 지우거나 떠오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다'라는 의미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