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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제목부터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무조건 읽고 싶었다. 더구나 바다가 있는 여수의 풍경들도 만나 볼 수 있는 책이지 않은가. 김정운 교수의 에디톨로지를 읽었던 기억도 이 책을 선택하는 데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해 김정운 저서 누적 100만부 돌파 기념으로 에디톨로지가 하드커버 스페셜 에디션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대단하다.
각설하고, 바닷가 작업실 미역창고를 구입하고 (그것도 미친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시세보다 두 배나 더 주고 산) ,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만끽하는 작가에게 큰 파도 없이 잘 흘러가기를 먼저 기원하는 바이다.
책을 받아들고 가장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슈필라움’이라는 전혀 낯설고 새로운 단어였다. 책에 소개된 슈필라움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 말은 독일어의 ‘놀이’와 ‘공간’이 합쳐진 말로써 주체적 공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여유공간’이라 번역되며, 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을 넘어 ‘심리적 공간’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어의 퀘렌시아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퀘렌시아란,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또는 그러한 공간을 찾는 경향을 의미하며,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에서 선정한 2018년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원래 퀘렌시아는 스페인어로 ‘애정, 애착, 귀소 본능, 안식처’ 등을 뜻하는 말로, 투우(鬪牛) 경기에서는 투우사와의 싸움 중에 소가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는 영역을 이른다. 이는 경기장 안에 확실히 정해진 공간이 아니라 투우 경기 중에 소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피난처로 삼은 곳으로, 투우사는 퀘렌시아 안에 있는 소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작가의 슈필라움은 그저 안식만 하는 곳은 아닌 듯 하다. 그곳에서는 그의 무한한 창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 그래서인가? 책을 읽어가며 느껴지던 ‘새로움’과 ‘깊은 통찰’의 깨달음은.
김정운 작가에게서는 한국인이면서도 세계적인 사유에 부족하지 않고 유유히 나아가는 힘이 보인다. 어느 한 페이지라도 건성으로 넘길 수가 없이 착착 와 감기는 맛이 베어있다. 함께 작업했다는 김춘호 사진작가의 여수풍경들을 보는 맛도 특별식을 먹는 듯한 기분이다.
”여수 앞바다에는 섬만 365개다. 사실은 몇십 개가 부족한데 물이 다 빠지면 겨우 드러나는 바위섬들도 숫자에 맞춰 포함시켰다. 그런데 이런 걸 꼭 따지는 인간들이 있다. 사랑을 못 해봐서 그렇다. 부족하면 채워주는 게 사랑이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가치에 너무 휘둘려 살아왔음을 깨달은 작가가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니 무엇인가 위로 받은 기분도 드는게 사실이다. 결국 인생이란 사람사랑이고, 그 사람들과 함께 가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도 자기만의 슈필라움을 꿈꾸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평안을 기원하는 바이다. 나를 포함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