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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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사실 정여울 작가의 소개글을 읽고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이방인에 대한 불가능한 사랑의 아름다운 통찰, 비극적인 통찰"이 담긴 소설이라고 소개한다. 그래서 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여울 작가의 소개글이 의아하게 다가온다. 사랑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혹시 제국의 치안판사 '나'가 눈먼 야만인 여자를 향한 감정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건가. 이때부터 나는 이 소설에 대해 혼란을 갖기 시작한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그린 소설로 읽어야 할지, 정치소설로 읽어야 할지.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문장은 짧고 명료하지만 은유적이고 모호하게 느껴졌다.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더듬더듬 읽어나갔다. 무엇하나 확실하게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눈보라가 치는 회색의 변경 시내가 생각날 뿐이다. 시내에서 동냥하는 야만인 여자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온 치안판사는 그녀와 함께 생활한다. 그녀의 몸을 씻겨주고, 어루만지며 "황홀경"에 빠지고, "도끼로 찍힌 것처럼 잠에 압도"되기도 한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동정심 때문인가, 낯선 여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변태적)욕망에 이끌려 그녀를 데려 온 것일까. 어느 날 그는 그녀와 함께 하는 생활을 하다 그녀를 야만인 부족에게 데려다주려고 한다. 자신을 수행할 세 명의 사람과 함께. 지난한 여정이다. 열이틀 동안이나 되는 여정의 끝에 드디어 만난 야만인 부족에게 그녀를 떠나보낸다. 허무하게. 그녀와 지낸 몇 달 동안 그는 "그녀의 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나의 욕망은 그런 방향이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위선적이다. 눈먼 야만인 여자를 부족에게 데려다주고 변경으로 돌아온 그는 반역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그 뒤로는 온갖 고문에 시달린다. "한가로운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는 제국의 치안판사에서 하루아침에 반역자로 몰린 그는 수난을 당한 뒤 변경 시내를 떠돌아다니는 비렁뱅이가 된다. 그의 자기희생(그렇게 여겨지는 것이었다면)은 야만인들을 구원해주지 못했다. 그의 수난에 조소가 떠오른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확실하게 구분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존재였다. 소설을 읽고 난 뒤에 확실하고 선명하게 잡히는 건 없었다. 소설의 배경인 변경의 시내가 뿌옇게 떠올랐다. 눈보라가 치는 회색의 광장이. 한번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이다. 나는 단순히 제국과 야만인의 이분법적 대립을 이야기한 소설이라고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에 대한 사랑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이해되지 않는 혼란스러움을 남겨둔 채 이 소설을 내버려두고 싶다. 섣부른 해석은 피하고 싶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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