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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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달에 걸린 15살의 미하엘은 "어느 월요일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구토를(p.9)" 한다. "토하는 것 역시 내 인생에서는 처음 있는 일(p.10)" 이라고 하는 미하엘은 낯선 여자의 손길을 느낀다. 바로 한나다. 한나와 미하엘의 첫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나의 집에 꽃을 들고 찾아간 미하엘은 그곳에서 당혹스러운 감정에 휘말리고 마는데, 그것은 그녀가 미하엘과 함께 외출하기 위해 부엌에서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목격한 뒤부터다. 


그녀는 한쪽 다리로 균형을 잡고 그 다리의 무릎 위에다 다른 쪽 다리의 발꿈치를 올려놓고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서 돌돌 만 스타킹을 발가락 끝에 끼우고는 발가락 끝을 위자 위에 올려놓은 후 스타킹을 장딴지를 거쳐 무릎을 지나 허벅지까지 끌어올리고는 옆으로 머리를 숙여 스타킹 밴드에다 고정시켰다. p.22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그리고 처음에는 맨살로 창백한 모습을 보이다가 스타킹 속에서 비단처럼 은은하게 빛나던 그녀의 다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p.23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목격한 후 알 수없는 감정에 휘말린 그는 당혹감에 한나의 집을 뛰쳐나왔다. 일주일 뒤 다시 한나의 집을 찾은 미하엘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녀와 육체관계를 맺는다.

"바로 이것 때문에 너는 여기 온 거야!"

"나는......" 

(...)

우리는 너무 가까이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벌거벗은 몸 앞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

(...)

그녀는 웃으면서 양팔로 나의 목을 끌어 안았다. 나도 그녀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p.37


나는 두려웠다. 신체적 접촉이, 키스가, 그리고 내가 혹시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그러나 우리가 잠시 끌어안고서, 내가 그녀의 몸 냄새를 맡고 그녀의 체온과 힘을 느끼고 나자,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손과 입을 통한 몸의 탐색, 입술들의 만남. p.37


첫번째 관계를 맺은 후 그녀에게 흠뻑 빠진 미하엘은 날마다 마지막 수업을 빼먹은 뒤 그녀를 찾아갔다. 그들의 사랑은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p.60) 그들의 사랑은 매일 이런 만남의 의식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한나와 미하엘은 부활절 연휴에 나흘 간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한나와 미하엘은 서로 사소한 오해하나로 크게 싸우게 된다.(이 사소한 오해와 더불어 앞의 정황을 살펴보면 그녀가 혹시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간단히 가버릴 수 있어!"

(...)

"건드리지 마." 그녀는 원피스 위에 둘렀던 폭이 좁은 가죽 허리띠를 손에 들고 있다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서 내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 내 입술이 찢어졌고, 피 맛이 느껴졌다.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그녀는 허리띠를 다시 한 번 높이 치켜들었다. p.75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예요? 왜 그렇게 화가 났었어요?"

(...)

"뭐가 잘못됐어요, 뭐가 잘못된 거예요? 넌 항상 멍청한 질문한 하는구나. 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간단히 가버리는 게 아냐."

"하지만 나는 당신한테 쪽지를......"

"쪽지라고?" p.76

미하엘은 한나와의 책 읽기와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란히 눕기로 이어지는 그들의 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가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급한 후에는 한나와 학교, 공부 주변만을 맴도는 생활에서 벗어나 있었다. 미하엘은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고 자신의 또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져갔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런 기분은 싹 사라졌다. 어느 순간 나는 숙제를 하고 배구를 하고 떠벌리며 여자애들하고 시시덕거리는 수영장의 여느 오후와 다름없는 분위기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그때 내가 무슨 일에 몰두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이삼십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 그녀는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나도 돌아보았다.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가지 않았다. (...) 우리는 왜 여태껏 한 번도 우연히 만난 적이 없었던 걸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는 등의 의문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나는 일어났다. 일어서느라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p.106-107

수영장에서 마주친 한나와 미하엘.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한나가 오늘 아침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래도 제때 전화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신 투입할 수 있었지요. 전화로 이젠 안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 영원히."


"2주 전에 그녀는 바로 여기에 앉아 있었어요.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에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전차 운전사 교육을 받도록 해주겠다고 제안을 했지요. 그런데 그녀는 모든 것을 내팽개친 겁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법학생이 된 미하엘이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은 법정에서였다. 



책을 읽으면서 한나가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미하엘이 진즉에 그녀가 글을 읽을 수 없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인 걸 알았다면, 그녀를 위해 글을 가르쳐 주었다면 그녀는 수용소 감시원이 아닌 전차 운전사로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지만 (소설 속)운명은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지? 그리 쉽게, 주인공들을 행복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지?(그럼 소설이 재미가 없으니깐.) 한나는 무지했고, 또 성실했다. 그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렇다고 그녀가 행한 일들을 단지 그녀가 무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용서할 수 있을까. 15세 소년과 36세의 한 여인의 사랑이야기가 이렇게 복잡하게 흘러가게 될지 누가 알아겠는가. 이 소설 이야기는 옳고/그름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이야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독자들은 '도덕적 판단을 중지'(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민음사)시키는 이 소설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15살과 36살의 사랑에 놀라고, 유대인 수용소까지 등장하니 더 놀랄 수밖에.

이 두 놀라움이 이야기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전개되는 소설을 읽으면서 놀라움이 먹먹함으로 그리고 씁쓸함으로 변하는 과정을 한번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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