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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3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3 무렵, 막 수능을 마치고 가,나,다군 입시대비 논술수업을 듣고 있을 때였다. 학원에서 나눠준 인문/사회/자연영역 교양서 요약집을 읽다가 그저 '묘한 제목도 다 있네' 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렸던 것이 이 책과의 첫만남이었는데, 그 때는 이 책이 '이기적 품성을 만드는 유전자'에 관한 내용인 줄만 알았다. 명색이 이과인 나였지만 선택과목을 화학2로 골랐기 때문에 생물2 쪽은 거의 깜깜하다시피 해서 제목에 유전자가 나오든 DNA가 나오든 큰 관심은 갖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용케 논술시험을 보지 않고 가군에 합격한 덕분에 학원에서 받은 요약집은 애저녁에 재활용 쓰레기로 분류해서 내다 버렸지만, 의외로 이 책은 대학 시절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꿈에 부풀어서 괜히 꼼꼼히 읽던 학보에 '새내기에게 추천하는 대학 필독교양도서' 명목으로 이 책이 소개되어 있기도 했고 전공 특성상, 물리-생물-화학 전 분야를 아울러야 하는 탓에(?) 고등학교 때만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생물 공부를 대학 내내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유전 부분을 배우면서 은근슬쩍 교수님께서 도킨스의 이 책을 추천하고 지나가신 적도 있었다. 제목을 계속 듣게 되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긴 했지만 역시 학교 수업 따라가느라 바쁘고 친구들이랑 노느라 바빠서 모처럼 서점에 갈 때도 표지만 슬쩍 만져보고 오곤 했는데, 대학까지 다 졸업한 지금, 겨우 인연이 닿아서 이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결국 읽을 책은 읽게 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기는 한다.
책을 찬찬히 읽어나가면서 가장 처음 느꼈던 것은 처음에 생각했던 '이기적 품성을 만드는 유전자'에 관한 내용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이 책의 주요 논지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유전자가 갖는 '이기성'에 관한 것으로, 우리가 행하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도 알고 보면 모두 이 유전자의 이기주의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이 이기성은 단순히 떡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이 서로 먹겠다고 투닥투닥 싸운다는 피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껏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윤리, 도덕관에까지 모두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 정도로 절대적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충격이 컸던 부분은 부모자식 간의 이타성에 대해 서술해놓은 부분인데, '당연히' 부모니까, 자식이니까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기존의 윤리관을 철저하게 냉정한 이기주의로 분해를 하다시피 해놓아서 읽어나가면서 이유 모를 무서움에 부르르 몸이 떨린 적도 있다. 그 밖에, 책에 실린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되도록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확실한 혈연관계가 있는 순서대로 상대를 아낀다는 이야기며, 자신과 같은 계열의 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보호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동물들-원숭이나 돌고래-의 이야기는 지금껏 우리가 '온정'이니, '따뜻한 마음'이니 하는 것으로 윤색해서 보아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아주 냉정한 것이었다. 서문에 나오는 한 여학생의 '인생이 허무하고 목적도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는 푸념도 이해가 갈 법 했다.
또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신선했던 점은 유전자(gene)의 개념에 맞추어 인간에게 통용될 수 있을 문화적 유전자-밈(meme)의 개념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단순히 유전자 개념만을 가지고는 인간의 진화를 완벽히 설명해낼 수 없다. 인간에게는 이미 잘 발달된 두뇌가 있고, 경우에 따라 유전자의 명령에 굴하지 않고 후천적으로 학습 혹은 세뇌된 가치관에 따라 행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점을 매끄럽게 설명해내기 위해 새 개념을 도입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개념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어떤 사소한 것 하나도 모두 자신이 하고 있는 학문에 맞추어 생각해낼 줄 아는 학자의 면모를 엿본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참 신기했다.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저도 모르게 모든 것을 자신이 하는 일에 맞추어 생각하게 되는, 자기만의 프레임이 생기게 된다는데 도킨스의 프레임이 아마 meme 부분에서 특히 빛을 발한 게 아닌가 한다. 이 meme으로부터 풋내기 과학도로서 도킨스에게 본받고 싶은 점을 우연찮게 알게 되어 개인적으로 기뻤다.
출판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선하고 충격적인 내용들이다. 인류학이나 동물학 쪽은 데즈먼드 모리스의 책 두어 권 읽은 것이 전부라서 깜깜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다위니즘 및 동물행동학에 관한 다른 책들을 더 찾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를 끌었다. 특히 이 다음 저작이라는 '확장된 표현형'은 조만간 수중에 돈이 들어오는 대로 구입을 할 생각이다. 다만, 본문 445쪽이라는 적지 않은 양의 텍스트를 읽어내면서 독해속도에 도움을 주지는 못할 망정, 계속 태클을 걸어온 번역 문제는 말을 한 마디 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평소에 일반 소설은 1시간에 150쪽에서 200쪽, 논픽션이나 인문서적의 경우엔 1시간에 적게는 50쪽에서 많으면 100쪽을 읽는 정도인데, 이 책은 한 시간에 15~20쪽을 겨우 읽는 정도에 그쳤다. 읽으면서 내내 '내가 난독증에 걸렸구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한 페이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는데, 이는 한 번 읽는다고 내용이 바로바로 머리속에 들어오는 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내용도 내용이지만 번역자의 글다듬기 내공도 약간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했다.
개인적으로 한국 작가의 저작보다 번역서, 특히 인문철학, 논픽션 계열 번역서의 문장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편인데, 이는 그 분야가 읽는 이를 배려하여 성의껏 번역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비록 일반 소설 장르보다 책이 소비되는 정도는 적지만, 그 대신 꼭 읽어야 하는 사람, 읽겠다고 맘먹은 사람들이 작정하고 잡게 되는 분야가 이 쪽 분야이다. 호기심에 잡고 읽다가 금방 덮는 류의 책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 만큼, 이런 쪽의 번역을 맡는 사람들이 좀 더 매끄럽고 읽기 쉬운 번역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항상 갖고 있는데, 이 책의 경우에는 원문 하나하나를 꼼꼼히 옮기려는 노력은 엿보였지만 그 탓에 정작 한국인도 읽기 어렵다고 느끼는 한국어판이 되었다. 단번에 해석하기 어려운 비문도 간간이 보이고, 영어단어의 뜻을 그대로 옮기려다 그만 어색한 한국어 표현을 쓴 흔적도 보이는 것 같아서 그 점이 아쉬웠다. 전문 용어가 아니라면 원문에 실린 단어의 사전적 뜻이 아닌 다른 우리말 표현을 대신 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의 '문장의 의미 이해'를 더 높일 수 있다면 말이다. 다음 판이 나오거든 그 때는 베타테스터를 뽑든지 해서 일반 독자가 더 읽기 쉬운, 흐름 좋은 글로 책을 펴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