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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 - 전12권 세트
조설근 외 지음, 안의운 외 옮김 / 청계(휴먼필드)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중국 4대 기서라는 이야기, 고등학교 때 고전문학을 배우면서 종종 몽자(夢字)소설의 대표적인 예로 듣고 배워왔던 [홍루몽]을 직접 손에 쥐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성격이 진득하지 못하고 급한 탓에 전 12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뭐야, 삼국지보다 더 길잖아?'라고 투덜대긴 했지만, 그 길이가 읽는 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설은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그 농담이 잘 나타나있었다. 같은 몽자소설인 '구운몽'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대의 어느 소설을 가져다 비교해도 경쟁력이 있을 만한 길고 먹음직한 이야기. 한 집안의 가족사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한 개인의 사랑과 숙명을 세세히 그려내는 치밀함. 거기다 읽을 수록 맛깔나는 번역자의 문장과 화려한 삽화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소설이었다고 본인은 감히 말하고 싶다.
12권에 걸쳐 흘러가는 이 긴 소설의 뼈대는 가씨 집안의 흥망사지만 진정한 핵심은 가보옥과 임대옥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다. 그 정도로, 읽다보면 '이거,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인가?' 하는 느낌이 들 만치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기류가 심상찮다. 물론 이들이 이탈리아의 그네들처럼 한 눈에 빠지는 격정적인 사랑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차근히 그러나 무섭도록 깊어지는 애정을 서로 드러내놓고 전하지 못해, 눈빛으로 말다툼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애타는 심정을 전하고 싶어하는, 목하 첫사랑 중인 이팔청춘 그들을 보면 본의 아니게 읽는 사람 스스로의 첫사랑이 생각날 정도다. 특히 소설 중반에 나오는 대옥과 보옥의 선문답에서는 대옥이 갖고 있는 불안함과 어쩌지 못할 사랑이 행간마다 배어나오는 바람에, 읽으면서 줄곧 눈물을 뚝뚝 흘렸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니 둘이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보옥에게는 이미 정해진 다른 인연-설보채와의 '금옥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현세에서의 보옥은 원하지 않는 상대와 혼인하게 된다. 얼마나 덧없는 두 사람의 사랑인지. 그 대목을 읽고 '결국 갈라놓았구나!'하고 이미 고인이 된 작가에게 성을 내게 되는 것은 아마 내 성격이 급한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 중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대옥의 절명에서 느껴지는 비통함의 카타르시스, 저도 모르게 같이 울며 '인생은 다 이런 것인가'하고 되뇌게 되는 그 드라마성도 아마 그런 분노와 절망에서 나오는 것이지 싶다.
소설에서, 보옥은 두 가지의 인연을 갖게 되는데, 전세에서부터의 목석의 인연도, 현세에서의 금옥의 인연도 어느 하나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었다. 마음은 목석의 인연을 갖는 대옥에게, 진짜 연분은 금옥의 인연을 갖는 보채에게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모두 제 1이면서도 결국 진정한 제일은 될 수 없는, 가짜도 아니고 진짜도 아닌 인연. 집안 사람들에게 속아 보채와 혼인한 뒤 넋이 나가버리는 보옥도, 혼인식 날 피를 토하며 보옥과 주고받은 시가를 태우고 그만 절명하고 마는 대옥도, 평생 낭군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가씨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가는 보채도 모두 이 인연의 희생자였다. 일견 대단한 듯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그저 사람이 만나고 헤어질 뿐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들의 엮임을 보면 마치 옆에서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지. 이런저런 것에 눈을 빼앗겨 매혹되고 싸우고 울부짖어도 결국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지. 사람 사이의 맺음과 끊김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남은 생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지.' 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외에도, 소설에는 꽃처럼 순결하고 꽃처럼 금방 져버리고 만 아가씨들, 한 때 부귀했지만 결국 몰락해버리고 만 권세가 가씨 부중의 모습, 출가의 길을 떠나는 보옥이 그려지면서 이야기 전체에 덧없는, 한 때 반짝 빛나고 말았다는 그 서글픈 느낌이 흘러간다. 그 안에서 인간들이 어떤 드라마를 펼치고 있더라도 시간은 묵묵히 흐른다. 정해진 톱니바퀴는 예정대로 움직인다. 그 안에 희노애락이 춤추고 눈물과 핏방울이 흩어져도 그저 담담히 흘러가는 세월. 그 무서운 현실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자리를 찾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소름이 끼치기까지 한 그 담담함에 마지막 장을 쉽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마치 향 연기처럼 애틋하고 아련한 이야기. 읽다보면 어느 새 눈물을 뚝뚝 흘리게 되고 마는 이 서정성과 비통. 연기는 흩어져 사라져도 그 향기는 주위에 오래도록 남듯,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아름다웠던 그들의 모습과 이루지 못한 사랑이 깨진 거울에 잠시 머무른 햇빛마냥 반짝, 우리 마음에 들어와 박힌다. [홍루몽]을 읽으면서 본인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아련한 향수를 갖고 바라보았다. 마치 우리가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갖는 향수같은 그런 아쉬움과 슬픔을 가지고. 몇 백년이 지나도 거듭 읽혀지는 [홍루몽]의 힘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세기를 뛰어넘어 전해지는 그들의 순수성. 아무리 많이 읽어도 이미 때가 탄 우리들의 눈에는 그것이 여전히 슬프고 아름답게 비친다. 때문에 우리가 아직까지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책은 아직 초판이라 후반부로 갈 수록 사소한 오타가 하나 둘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모두 문장부호에 관련한 문제라 크게 신경이 쓰이는 정도는 아니다. 200명 가량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터라 각 권마다 가계도가 거의 다 붙어있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권도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한 장 복사해서 옆에 두고 같이 보아가며 읽기를 권한다. 하지만 역시 재판이 나올 경우 출판사 측에서 따로 휴대용 가계도를 만들어 넣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중국풍의 삽화가 눈을 즐겁게 해주므로 읽으며 지루할 틈도 없고 이 시절의 소설이 흔히 갖는 성에 대한 세세한 묘사도 거의 없으므로 중학생 정도의 자녀에게도 걱정없이 손에 들려줄 수 있을 책이다. 한 질 사 두고 오래오래 읽을 책, 언제 읽어도 다시금 새롭게 느껴지는 책.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소설, 이 [홍루몽]의 진가를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부디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