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 그림으로 읽는 세상 '근대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군대 생활을 마치고 오는 길. 시골 버스를 탔는데, 80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자리를 내어주었다. 가는 내내 내 팔과 다리를 쓰다듬는 할머니는 내 이름을 묻고서는 당신 어머니와 성이 같다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드센 할머니의 과격한 자기고백은 운전사의 장단과 어우러저 한편의 판소리를 듣는 것 같다.

내가 지금도 이렇게 기가 센데, 어느 남자가 날 데리고 살았겠어? 안 그래? 그래도 내가 요즘 세상에 태어났으면 좋은 일 많이 했을거야. 옛날에는 여자들이 뭘 못하게 하는 세상이었어.

할머니의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할머니의 에피소드가 너무 재밌어서 집으로 오는 길에 책 한권을 사 그 귀퉁이에 적어놓았다. 그 책이 이택광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였다. 그가 <말>지에 ‘그림으로 읽는 근대’를 연재할 때 부터 이건 범상치 않은 글임을 알았다. 책으로 나오면 반드시 사야겠다는 다짐을 했었고, 마침 제대하고 집에 오는 길에 책으로 나왔음을 알고 냉큼 집어들었다.

이 책의 강력한 특징은 근대 회화를 사회역사적 시작으로 해석하는 것에 있다. 이택광은 기존의 만연한(적어도 대중에게) 미술비평을 ‘인상비평’이라 칭하고 그것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웬디 수녀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의 책이나 다큐를 본 사람은 무엇을 지칭하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시중에 나온 대부분의 미술사 책들이 인상비평 아니면 미술교과서식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비드는 신고전주의고, 신고전주의는 고대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생긴 것으로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고...(이 점에서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말>지에 연재된 이택광의 연재 '그림으로 읽는 근대'는 파격이었다. 왜 한국에서는 서양 미술사를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이 없을까 하던 차의 이택광의 글을 보게 된 것이다. 사회과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본 그림들은 대단히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해석 역시 매우 풍요로왔다.

······ 피사로의 생각과는 달리, 인상파의 오른쪽에 서 있는 인물들은 충실하게 제3공화정의 정책에 부합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 르누아르가 그린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라는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화려하게 묘사되어있는 ‘물랭 드 라 갈레트’는 파리 코뮌의 지도부가 있던 곳이다. 한국의 1980년대 광주로 치자면 도청인 셈이다. 이곳을 화려하게 채우고 있는 사람들도 한때 파리 코뮌에 팜가 했을 터이다. 이제 저들은 과거의 기억은 잊고 즐겁게 술을 마시며 춤을 추고 있다. 르누아르에게 질세라 드가 역시 군중으로 넘쳐나던 콩코르드 광장을 텅 빈 곳으로 그려놓았다. 이 광장을 압도하는 인물은 부르주아다. ······ 후일 르느와르와 드가는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반유태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왕정복고를 공개 주장했다.

http://www.penwith.co.uk/artofeurope/renoir_moulin_galette.jpg 그림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에러가 있습니다.

싸 구려(?) 헐리우드 영화든 고다르의 이해 못할 영화든 그 들 나름대로는 이것저것 집어넣는 데이터가 참으로 많다. 문제는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자란 나 같은 사람들은 전혀 이해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블록버스터를 보지만 실은 주인공의 억양은 어디 억양이고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식의 해석도 불가능 한 것이다. 미술사 역시 마찬가지인데, 소위 ‘西洋事情’에 어둡고 입시 공부외에는 한 게 없는 내 또래 세대의 비극은 아닌지 모르겠다. 여담으로 대학에서 고학년들을 대상으로 유럽근대사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맑스께나 읽던 친구들이 라인강과 알베강이 어딨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그래서 한동안은 지도만 그려줬다.) 내가 굉장히 놀라자, 다른 사람들은 내가 놀라는 것에 놀라워했다.

이 책은 인상파와 라파엘 전파를 집중분석하여 19세기 근대의 모습을 조망하고 있다. 저자의 시각은 근대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라파엘 전파와 인상파에만 그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데 이후 중세와 현대에 대해서도 저자가 연재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알고 있다. 이 역시 책으로 묶여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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