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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 살인사건 ㅣ 탐정 글래디 골드 시리즈 3
리타 라킨 지음, 이경아 옮김 / 좋은생각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누가 봐도 일흔 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파의 옷차림은 이채롭다. 질곡의 세월을 감추려는 듯 젋은 여자들 못지 않은 진한 화장과 머리 위에 다소곳하게 고정된 붉은 머리카락은 한껏 부풀어 올라 그녀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거기에 나이를 잊은 듯한 가슴이 푹 파인 붉은 칵테일드레스와 하늘거리는 보라빛 롱스카프까지 더해져 묘한 분위기까지 풍긴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사로잡는 건 그녀의 고혹적인 표정과 몸짓이다. 그건 분명 사랑에 빠진 여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모습이다! '살인'을 소재로 하는 추리소설의 표지 모델로 내세우기에 그녀는 너무 늙었고 또 너무 사랑스러웠다. 양볼을 붉게 붉힌 그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로맨스? 살인사건? 또 로맨스와 살인사건은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TV 프로그램의 구성 작가, 스토리 에디터와 프로듀서로서 다양한 작업을 해 온 리타 라킨은 미국 작가 협회에서 수여하는 상과 '에드거 앨런 포 상'을 포함한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저자는 오랫동안 선망해 오던 추리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을 모티브로 자신의 첫 번째 소설 주인공으로 글래디 골드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탄생시켰다. 『맛있는 살인사건』,『플로리다 귀부인 살인사건』에 이은 『카사노바 살인사건』은 글래디 골드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이었다. 앞서 두 작품을 읽지 못한 나로서는 한참 방영중인 드라마를 중간부터 봐야하는 껄끄러운 느낌이 들긴 했지만 두 장에 걸친 등장인물 소개와 1,2편에서 나온 과거를 곱씹는 장면에서 그럭저럭 지나간 줄거리를 더듬어 볼 수 있었다.
평균 연령 76.4세인 다섯 명의 할머니들로 구성된 노인 탐정단. 잠깐, 노인 탐정단이라고? 그것도 평균 연령 76.4세? 탐정이라고 하면 흔히 범인을 능가하는 비상한 두뇌와 재빠른 운동 신경을 소유한 '젊은이'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인 에도가와 코난처럼 은신하기에 유리한 초등학생 신체라도 지녀야 한다. 대체 리타 라킨은 무슨 생각으로 여느 모로 살펴보나 탐정으로서 유리한 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노인 탐정단을 구성한 것일까? 어느 날, 앨빈 퍼거슨이라는 사람이 노인 탐정단을 찾아와 자신의 어머니가 욕조에 빠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함께 살았던 필립 스마이스라는 남자를 조사를 해달라고 의뢰(그래도 의뢰는 들어오는 구나;)를 해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향년 95세인 그의 어머니 에스더 퍼거슨과 20살 연하인 스마이스는 연인 사이로, 두 사람은 상류층 노인들만 이용한다는 포트로더데일에 있는 실버타운 그리슨 빌라에서 한 아파트를 사용했다. 뚜렷한 살인 동기나 물증은 없었지만 앨빈은 완고한 자세로 필립 스마이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노인 탐정단의 리더 격인 글래디스 골드(글래디)는 탐정단의 일원이자 친동생인 에벌린 마코위츠(에비)과 함께 필립 스마이스가 곧 입주하기로 되어있는 월밍턴 하우스에 잠입수사를 착수하게 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개 노인들 뿐이지만 전반적인 소설의 분위기는 그리 어둡거나 칙칙하지 않다. 오히려 찬란한 태양이 부서지는 수면 위로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생선들처럼 넘치는 생동감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노인 탐정단을 비롯한 많은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넘친다. 그렇다고 그녀들의 수사 진행 속도 역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극적 긴장감을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될 일이다. 이른 아침, 산책을 나온 노인의 발걸음처럼 긴 호흡을 지닌 추리 소설이다. 가끔 발걸음을 멈추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 두어 번 있었는데 그건 사건의 전개와는 별개의 일이다. 돌파리 의사 때문에 환각제를 먹어 난동을 부리는 소피와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는 밀리의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적은 그녀들이기에 신체의 작은 변화에도 촉각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최근 노인을 주연으로 내세운 광고나 영화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대부분이 노인 특유의 완숙미와 삶의 지혜를 돋보이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나오는 노인들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산 '젊은이'에 불과했다. 그의 비밀을 밝혀내겠다며 필립 스마이스에게 접근한 73세의 에비는 그만 살인자와 사랑에 빠졌고 동생의 위험한 사랑을 지켜보며 충고를 하려드는 75세 글래디 역시 남편 잭 골드의 살인 사건에서 조우한 잭 랭포드와 아슬아슬한 사랑의 감정 싸움 중이다. 단순히 황혼의 로맨스라고 치부기엔 감정 소모가 심하고 열정이 넘치는 사랑이다. 그녀들의 삶은 결코 마무리 짓는 단계가 아닌 아직 한참 성장하고 쉽게 상처받는 ing형인 소녀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화려하게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살인자와 사랑에 빠진 에비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두 명의 잭 사이에서 사별의 아픔과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는 글래디는 과연 잭 랭포드와 화해하고 그의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을까? 에비의 사랑은 『카사노바 살인사건』에서 마무리가 지어지고 글래디의 사랑은 제 4편 『추억 속의 살인사건』으로 여지를 남겨 놓았다. 내가 그녀들의 나이 만큼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들로 하여금 노인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 만큼은 확실하다. 더 오래 살았기에 더 많은 상처가 있고 더 쉽게 상처받는 그녀들을 꼭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