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붉은 손가락』은 '누가' 사건을 저질렀나보다 '왜' 사건을 저질렀나에 초점이 맞춰진 추리소설이다. 따라서 소설 초반에 범인과 범행 방법에 대해 낱낱이 밝힌 후, 독자들에게 '왜'라는 이유를 좇게 만든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건 추리소설의 긴장감이 반감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마에하라네 가족 이외에 용의선상에 떠오른 인물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딱히 이렇다할 논리적인 장치 없이 오로지 형사 가가 교이치로의 '감'에만 의존한 채 사건은 너무나도 쉽게 풀려버린다. 냉정한 관점에서 본다면 추리소설로서는 그다지 매력이 없다. 전통 추리소설의 묘미를 기대하고 읽은 독자라면 적잖이 실망할 것이다. 다만, 현대의 가족상과 고령화 시대에 노인들의 가족과 사회 내에서의 지위에 대한 풍자와 문제의식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난 이 책의 가치를 발견했다.

 세대주는 마에하라 아키오, 47세. 처는 야에코, 42세, 14세의 아들과 치매에 걸린 72세 된 어머니.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이 가족은 그다지 눈 여겨 볼 만한 사항은 없어 보인다. 흔히들 말하는 평범한 가정인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 이 가정 내를 깊숙이 들여다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저 '가족'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한집에 살면서도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야에코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올바른 관심이나 애정이라고 볼 수 없다─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며 의사소통은 단절된 채 남보다도 못한 관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는 가족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식사시간이 해체되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족의 식사시간은 단순히 밥을 먹는 행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바로 가족의 대화를 통해서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가족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느끼는 시간인 것이다.

 아키오는 늘 문제가 닥치면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하기보다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소극적이고 근시안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내 아키오는 오직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살아가지만 그 사랑이 결국 아들을 파멸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의 하나뿐인 아들 나오미. 부모의 올바른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하여 마음 속엔 늘 분노가 가득 차 있으며 사회성이 부족하다. 이런 가족들 틈에 끼어 그들과 마주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만 생활하는 어머니. 그 누구도 자신들의 문제를 직시할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상처가 나면 바로 치유하고 약을 발라야 한다. 치유의 과정은 쓰리고 아프다. 하지만 그 과정이 고통스럽다고 마냥 상처를 내버려 두면 결국 곪아터진다. 어떤 식으로든 상처는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아들 나오미를 통해 마에하라 가족이 방관하던 마음의 상처는 결국 묵혀왔던 고름을 터뜨렸다. 녀석은 대담하게도 7살짜리 여자 아이를 자신의 집에서 살해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아키오 부부는 사건을 은폐하는 것도 모자라 최후의 수단으로 내밀었던 카드는 결코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될 짓이었다.

 마에하라 가의 맞은편에 사는 이웃집 사람이 기억하는 마에하라네 가족들은 비교적 평범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들은 결코 '평범'한 가족이 아니었다. 대가족 시절에 노인들은 집안의 어른으로서 존중받았고 손주들은 부모의 효심을 보고 자라며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며 자랐다. 하지만 오늘날의 핵가족 속에서 노인들은 그저 자식들에게 짐으로만 여겨지고, 바쁜 현대인들은 가족과 함께 식사는커녕 얼굴 마주 볼 시간도 부족하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무관심해지고 점점 단절되어 간다. 바로 마에하라네 가족처럼 말이다.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난 평범한 사람인가? 우리 가족은 평범한 가족인가? 그런데 '평범하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우선 '평범하다'란 단어부터 정의해 보기로 한다. 사전을 뒤적여 본다. 평범하다[平凡--] : [형용사]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 라고 나온다. 역시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이 소설을 천천히 곱씹어 보니 정의조차 애매한 그 뜻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내린 '평범하다'의 정의는 상처가 있을지언정 그 상처를 못 본 체하지 않고 치료를 시도하는 노력, 그 자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