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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외모나 학력 등 각종 스펙에서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기적 유전자'의 소유자라 부른다. '이기적 유전자'란 용어는 1976년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가 주장한 이론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것처럼 특정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은 '이기적 유전자'를 담기 위한 하나의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전까지 진화생물학은 그 논리적 기초를 다윈의 자연선택론에 둔다고는 했으나 많은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의 단위와 대상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생물은 모두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종의 보전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도록 진화했다고 믿었다.
진화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리처드 도킨스는 다윈의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유전자 단위로 끌어내려 진화를 설명했다. 오늘날의 정규 수업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하루 아침에 생물 개체 수준에서 유전자로 보는 관점으로 생명체를 관찰하기란 쉽지 않은 일─실제로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질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거나 염세관에 빠졌다고 한다.─이다. 이러한 현상은 토머스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을 빌려서 이해하면 당연한 일이다. 비록 그것들을 구성하는 자연 지식의 내용이나 과학적 사실들은 유사할지 모르나 패러다임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과학적 개념이나 범주, 자연관 등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40억 년 전, 스스로 복사본을 만드는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 대양에 나타났다. 이 고대의 자기 복제자(replicator)는 절멸하지 않고 생존 기술의 명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 복제자는 오래 전에 자유로이 뽐내고 돌아다니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제 복제자들은 거대한 군체 속에 떼지어서 로봇 안에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하였으며 그들을 보전하는 것만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일 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이토록 오랜 세월동안 자기의 생존 확률을 증가시켜온 유전자는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이 유전자가 들어앉아 원격 조정으로 교묘하게 다루고 있는 생명체가 이기적인 특성을 띠는 건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생명체를 오로지 이기적인 특성으로만 판단하기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그 부분에 대해서 도킨스 박사는 ESS(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ESS)개념을 바탕으로 다양한 동물들의 행동을 분석하여 생명체의 이기성을 논리적으로 관철시켰다. 하지만 그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성'에 주목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생존기계인 모든 생명체에 대한 이타성은 유전자 단위의 이기적인 태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라는 유명한 게임 이론이나 사회성 곤충의 습성을 이용하여 그 논의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부분은 꽤 흥미로웠다.
인간의 특이성으로 '문화'를 언급하면서 그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진화되는 것으로 유전자 이외에 '밈(meme)' 을 내세웠다. 모방을 통하여 뇌와 뇌 사이를 전달될 수 있는 실체로 정의되는 것이 바로 밈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그의 '이기적 유전자'이론으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던 인간 특유의 성질에 대한 끊없는 의문점이 밈 이론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밈'이 인간이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 주장하는 저자 스스로의 유일한 희망인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인간의 유일한 특성을 나타내는 단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그의 주장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질을 살펴본다면 정말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란 한낱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모든 생명체에게서 나타나는 특성은 이미 유전자에 의해 설계된 프로그램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리를 하나하나 잘 좇으며 이해한 사람이라면 마냥 비관하고만 있을 일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우리에겐 유전자의 이기적인 폭정에 반역할 수 있는 뇌가 존재한다. 실례로 인간은 그의 말대로 '피임'을 활용하여 유전자의 번영을 제어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과학 전공자나 이과 학생들이라면 수식과 도표가 거의 배제된 채 모든 설명을 일상적인 언어로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어 좀 지루한 감─실제로 한참 읽다보면 심리학이나 자기계발 서적을 읽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종종 들었다.─이 없진 않을 것이다.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 서적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다만, 정치, 윤리,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어딘가 모르게 다소 불편할 것이다. 그건 이 책의 의도를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얽히고설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만, 순수 과학의 현상에 대한 이해만큼은 여타 학문의 관점을 배제한 눈으로 살펴봐야지만 그 순수한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과학 이론이 종교 재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 인간 중심의 사고가 과학적 진보의 발목을 붙잡은 적이 어디 한두 번 뿐이었으랴. 그러니 도킨스 박사가 들려주는 생물학과 진화론을 열린 자세로 듣고자 하는 자세라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