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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보급판 문고본)
정재승 지음 / 동아시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에 대한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신선함'이다. 늘 팝콘과 콜라만 파는 극장의 주전부리 코너에서 어느 날 갑자기 뻥튀기와 살얼음이 동동 뜬 식혜를 팔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충격이었다고 할까? 책을 쓸 당시 저자는 27세의 나이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대학원 마지막 학기 동안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틈틈이 썼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물리학 이외에도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그런 그가 과학의 눈으로 짚어내는 영화의 과학적 설정의 오류와 SF 영화의 미래적 관점에 대한 비판을 재치있는 입담으로 맛깔나게 버무려 그 어떤 코미디 영화 못지 않은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했다. 나름 물리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이렇게까지 우리 일상 곳곳에 깊이 스며있는 학문이란 걸 이전엔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리학자와 함께 영화를 보고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함께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흥미로운 콘셉트(concept)로 목차를 다섯 가지로 나누고 각각의 목차에 해당하는 영화를 대여섯 편씩 소개했다. 전부다 흥미로운 주제였는데 그 중에서도 영화 속 '옥의 티'를 다루고 있는 1장과 생명현상을 다루고 있는 3장이 특히 인상 깊었다. 1장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옥의 티'가 '옥의 티'일 수밖에 없는 과학적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었고, 3장은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더 나아가 인간의 이기심과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여운을 남기기 때문인 것 같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읽을거리」 역시 본 내용 못지 않은 알찬 내용이라 그 부분만 따로 모아 읽었을 정도로 읽는 내내 즐거웠다. 더불어 그동안 SF 영화를 보면서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나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살아가는 것 같다.
주로 스릴러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 보는 편이라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37편의 영화 중(그 중엔 만화 영화도 있고 멜로 영화도 있지만 주로 SF 영화를 다루고 있다.)에 내가 본 영화는 예닐곱 편밖에 되지 않아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영화 속 장면이 막연하게 느껴질 땐 안타까웠다. 겨우 참고할 만한 사진은 각 소단원마다 영화 속 장면─이 마저도 본문에서 언급하는 영화 장면이랑은 거의 상관없는 컷들이 나온다.─이 한 장씩 흑백으로 첨가된 것 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SF영화를 즐겨보지 않은 당신의 개인적인 사정이지 않냐, 라고 따져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영화 속 장면이나 혜성, 바이러스, 홍채 인식 시스템 같은 자료들이 컬러 사진으로 함께 실렸다면 글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좀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긴 했다. 또, 1999년도에 발간한 책이라 요즘 같은 영화 홍수 시대에 고전이 되어버린 20C 영화들만 보는 건 사실 좀 지루했다. 조만간 저자의 <물리학자는 21C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를 읽을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희망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를 상대로 풀어놓은 과학 이야기 속에 대중들에게 과학이 친숙한 친구가 되길 희망하는 저자의 바람이 가득 담겨 있는 책이라 그런지 중학교 과정의 과학 수업을 받은 사람이라면 책 내용의 반 이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모든 SF 영화를 저자와 동일한 수준의 눈으로 과학적 설정의 오류를 찾아낼 수 있다거나 하루 아침에 엄청난 양의 과학 지식을 습득하길 바란다면 그건 과욕이다. 만약 이 책 한 권으로 그런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면, 미국의 20대 미혼 여성이 가장 선호하는 배우자 직업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101위가 물리학자─참고로 100위는 택시 운전기사였다.─라는 서글픈 현실 속에서도 12살 이후로 물리학자라는 꿈만 보고 달려왔던 그의 외골수 인생이 너무 가엾지 않은가? 다만 우리가 이 세상에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물리'란 학문이 그렇게 고리타분하지만은 않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주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