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 - 테오에세이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여행기 관련 책은 거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이상하게 손이 안 갔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타인의 여행기를 읽고 있으면 다른 분야의 책들과는 달리 저자와 나 사이의 거리감이 굉장히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일상을 벗어나 저자와 함께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고 있었지만 나를 훑고 지나가는 어제와 같은 무미건조한 도시의 바람과 내일과 같을 일상의 소음들은 이내 나를 무덤 같은 현실로 끄집어 내고야 말았다. 물론 책을 집어 던지고 저자의 흔적을 따라 훌쩍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현실은 시간과 경제적인 이유 같은 갖가지 핑계거리들을 내 앞으로 잔뜩 밀어 놓으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결국 저자의 달콤한 여행 발자취에 상대적 무력감을 느끼며 책을 덮어버린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제목부터가 남달랐다. <내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이 아닌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이라니……. 자신의 여행담을 일방적으로 들려주는 게 아니라 마치 나와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하는 것 같았다. 시린 쪽빛 하늘 밑으로 낮게 깔린 새하얀 뭉게구름, 지평선 끝까지 소금으로 뒤덮인 소금사막과 일렬로 줄을 선 양떼 같은 소금더미들. 볼리비아의 그 유명한 유우니 소금사막이다. 바로 이곳을 함께 여행하자는 것이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나는 주저없이 'Yes!!'를 외치며 그를 좇아 마음의 짐을 꾸렸다.

 책 표지에서 암시했듯이 이 책은 위로 넘겨 보는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애용하던 스케치북─그 크기를 1/4로 축소 시켜놓은 듯한─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다기 보다 그가 여행에서 찍어 온 비디오 영상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다른 여행기에 비해 무엇보다도 독특하다 느껴졌던 건 그가 거쳐간 지명은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 곳에 대한 지리적 위치나 정보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이 책에선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단지, 그의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그 곳엔 사람이 있었고, 그 곳의 전통 음식이 있었으며,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풍습과 문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담은 이채로운 색감들이 남실대는 사진들 속에서 그의 말랑말랑한 감성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는 여행의 시작부터 수줍은 존댓말로 말을 걸어왔다. 존댓말은 일반적으로 상대방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지만 때론 반말보다도 더 쉽게 친근함을 느끼게도 만든다. 그의 존댓말은 후자의 느낌이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의 바로 곁에 나란히 걸으며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여행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간혹 여행지에서 그의 나라를, 꼬레아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질문을 건넬 땐 달랐다. 그가 기억하는 꼬레아는 온통 잿빛으로 물든 도시의 사막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강하게 나를 밀어내거나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난, 그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겨지지 않은 꼬레아에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으니까…….

 여행 후반부 쯤, 유우니 소금사막을 걷다 발견한 플라밍고. 날개를 다친 플라밍고를 바라보며 그가 설명하는 꼬레아의 모습이 그토록 우울했던 이유를 담담하게 밝혔다. 그가 말하길, 그의 첫 여행 에세이 <당신의 아프리카에 펭귄이 방문했습니다>─후에 개정판을 발간하면서 이 책은 <당신의 아프리카에 펭귄이 찾아왔어요>라는 제목으로 바뀐다.─의 곳곳에 흩뿌려진 슬픔의 근원이라고도 했다. 그의 첫 여행 에세이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책에서도 충분히 아직 아물지 않은 그의 상처가 느껴졌다. 비교적 용감했던 그의 고백으로 나의 작은 오해는 풀렸고 그의 선택적 기억 속에 담긴 어두운 꼬레아의 모습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계곡 마을 꼬로이꼬, 꼬추나 폭포, 호수 마을 꼬파까바나, 티티카카 호수, 볼리비아의 마지막 마을 까사니, 아마존을 만드는 마을 루레나바께, 세계에서 가장 큰 코챠밤바의 그리스도상, 대도시 코챠밤바, 볼리비아 최대 코카 마을 차빠레, 탄광 도시 뽀또시, 유우니로 향하는 기차가 출발하는 작은 마을 뚜삐사, 소금 사막을 지키는 마을 꼴차니 그리고 마침내 유우니 소금사막.(주로 지명 위주로 짚어내다 보니 중간에 빠진 여로도 꽤 있다.)

 그렇게 좌절과 실패 속에서 도망치듯 시작했던 그의 여행은 어느새 습관이 된 듯 했다. 여행은 그가 잊고 있었던 시인이라는 꿈을 상기시켜 주었고 이렇게 테오에세이(Theo essay)를 통해 또 다른 삶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여독이 풀리자마자 그는 익숙하게 또 다른 여행을 향하여 달려갔을 것이다. 그의 세 번째 에세이가 나올 때 쯤 나도 여행을 향하여 달려가고야 말겠다! 여행을 가로막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며, 여행은 이 도시의 사막에서 파삭파삭 메말라 버린 내 감성마저도 말랑말랑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그로 인해 깨닫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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