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서있는 곳은 만물의 숨결마저 삼켜버린 암흑 속이었다. 기분 나쁘게 끈적이는 것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온몸을 감싸안았다. 놀란 나머지 그것들을 떨쳐 내려고 몸부림을 치며 악을 썼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고요한 암흑 속에서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적막을 깨고 요란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받아야할 중요한 전화가 있었기에 그 와중에서도 폰을 찾으려고 무의식중에 팔을 뻗었는데 보드라운 천 위로 차고 매끈한 무엇인가가 스쳤다. 눈을 감은 채 더듬어 모양과 크기를 가늠하여 보니 책인 듯 싶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진 의외의 감각에 서서히 의식이 깨어났다. "아! 꿈이었구나." 아마도 책을 읽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결에 통화를 마친 후,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베개 옆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꿈 속에서 느꼈던 그 불쾌한 기분은 여전히 현실의 연속선 상에 놓여 있었지만 십여 장 남은 책을 마저 읽기 위해 책을 펼쳐들었다. 마치 불편한 진실을 무미건조한 말투로 들려주려는 자와 다시 마주 앉은 기분이었다. 휴우. 마른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감추고 싶지만 감춰서는 안되는, 잊고 싶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숙명처럼 기억하고 살아가야하는 우리의 가슴 아픈 근현대사. 희망과 자유가 억압당한 그 시대에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1912.5.25.~1989.4.21.)의 삶을 오롯이 그려낸 책이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맞나 하는 의구심만 늘어갔다. 에피소드에서 느꼈던 스릴감과 박진감은 소설 서두에서부터 지루함과 따분함으로 바뀌어 책 읽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다. 작가의 특색없는 문체와 개연성 없는 사건 진행 역시 한 몫을 했다. 뭔가 큰 비중있는 인물인 것처럼 등장한 갑수는 소설 중반에 동생 기수와 수 년만에 일본에서 조우하였으나 그 자리에서 괴한의 습격으로 허무하게 죽어버렸고 가족과의 생이별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독립 운동을 한 허승은 비장해 보였으나 박무영과 이기수를 엮어주는 일 외에 딱히 조명할 일이 없었다. 독특한 캐릭터의 주변 인물로 인해 소설은 재미가 배가 되고 생기를 띄기 마련인데 오히려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다.

 고종의 사랑스러운 막내딸이었지만 일본의 볼모로 잡혀가 감내해야 했던 37년간의 비참한 삶, 원수나 다름없는 남자와의 강제결혼, 15년간의 정신병동 감금, 하나뿐인 딸의 자살, 조국의 외면은 한 인간의 삶으로만 본다 하더라도 분명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삶이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스러져가는 나라 앞에서 황녀의 삶이 그 정도였다면 당시 민중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위안부로 끌려가거나 그보다 더 악독한 삶을 살았던 분들도 많았을텐데 덕혜옹주의 입에선 "차라리 황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황녀로서 당하는 부당한 대우에는 서슬 퍼렇게 분노하면서도 결국은 현실에 주저앉아 시대와 신분 탓으로 변명하기 바쁜 그녀.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 임에도 스스로 신분의 틀을 깨고 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누군가가 구해주길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그녀. 어쩌면 자유를 갈망하는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건 일본도 조국도 신분도 아닌 그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과연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비록 조국은 그녀를 외면했지만 조국을 향한 그녀의 깊은 애국심? 아니면 역사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그녀의 비참했던 삶에 대한 재조명?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이 소설은 부족한 점이 많다. 마음 속으로만 외쳐대던 그녀의 조국 사랑은 가슴에 와닿질 않았고, '덕혜옹주의 삶'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발견했음에도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역량을 발휘하지 못해 고귀한 신분으로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초라한 삶을 살다간 한 여인으로만 그려냈다. 굳이 긴장감 흐르는 소설 전개나 덕혜옹녀를 영웅적 인물로까지 그리지 않았아도 소설을 통해 말하려던 덕혜옹주에 관한 뚜렷한 주제 하나만 있었더라도 책을 덮었을 때 밀려오는 소소한 감동 하나쯤은 기대해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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