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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가 개봉할 당시 예고편을 통해 큰 맥락의 줄거리는 알고 있었다. "바다에서 조난당한 한 소년과 호랑이 한
마리".
흡사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치열함, 어딘지 모를 바다 한가운데 뜨겁게 내리 꽂히는 태양에 타는 살과 마른 갈증. 영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머릿속으로 생생한
영상미가 펼쳐지고, 판타지와 실화의 경계선 상에서 더욱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군데군데 숨어있는
작가의 재치, 바다라는 대자연의 드라마틱한 요소를 언어로 풀어내는 필치, 그리고 예외 없이 엄지를 치켜들게 하는 이야기의 힘 때문에 너무
즐겁게 읽었다.
1부에서는 3개의 종교를 아우르며 다종을 하는 파이 덕에 이슬람 교, 힌두교, 기독교 파 종교인 3명이 우연히 만난 장면이 특히 재치 있었고, 태평양 한가운데
벵골 호랑이와 함께 난파되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2부에서는, 광활한 바다 위를 무대로 표현한 언어의 표현력에 밑줄을 긋게
만들었다. '천둥은 거대한 하늘의
나무'(p.288), '자연은 오싹한 쇼를 연출할 수 있다.
무대는 넓고, 조명은 드라마틱하고, 엑스트라들은 수없이 많다. 특별효과 비용은 무제한.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바람과 물, 모든 감각의 지진이 엮어낸 장관이었다.'(p.135)
하이라이트인
제2부에서 파이와 벵골 호랑이와 얼룩말과 하이에나(초반에만 등장)가 치열하게 생존한 장소이자, 책의 중요한 무대인 구명보트를 묘사한 장면은 사실
연상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방수포의 위치 등 벵골 호랑이가 머무는 장소이자, 파이가 가끔씩 그 위에서 쉴 수 있었던 중요한 장치이므로 정확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 트레일러와 책 표지를 보며 윤곽을 떠올리고 살을 붙였다. 특히 책 표지를 자주 들여다보며 엎치락뒤치락 대던 호랑이와
파이 사이의 공생관계를 떠올리기도 했다.

눈앞에서 날치떼가 바다에서 뛰어올라 파이의 얼굴을 때리고 구명보트 위로 떨어지는 장면에서는
팔팔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온순하고 순진한 미어캣으로 미어터지던 신비한 해초섬의 존재는 경이로웠으며, 밤이면 나무 위로 기어올라와,
파이의 팔과 머리 옆에 파고들어 같이 누워자던 까만 눈의 미어캣들은 읽는 내내 사랑스러웠다. 그런 미어캣들이 벵골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에서는 이런 표현을 썼는데,
미어캣들이 시선을 돌렸다. 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모두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몸을 돌렸다. 리처드 파커였다. 그는 나도 미심쩍어했던 바를 확인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포식자 없이 살아온 미어캣들은
상대가 날아들 거리라든가 덮치는 것, 두려움에 대한 인식을 타고나지 않았다. 리처드 파커는 미어캣 무리 속으로 움직였다. 살해자이자 파괴자의
꼬리를 번뜩이면서 미어캣을 한 마리씩 먹어치웠다. 리처드 파커의 입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고, 미어캣들은 그에게 딱 달라붙어 그 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면서 마치 "저요! 저요! 저요!"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p.334
살육의
현장을 표현한 것임에도, 끔찍하고 불쌍하다기보단 미어캣들이 저요! 저요! 하며 뛰는 귀여운 장면으로 희석된다. 표현의 차이인 것이다.
머리 꼭대기에 떠있는 뜨거운 태양빛,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는 달빛에 반사된
파도의 은빛처럼 이야기가 반짝반짝 빛났다.
마지막 3부에서는 식스센스 급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반전이
있었다. 무사히 육지까지 당도하고 끝나는 해피엔딩인 줄 알았는데 이런 엄청난 반전을 또 책 깊숙이 숨겨놓다니. 하지만 나는 2부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파이 이야기의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를 즐겼기 때문에 이 책은 그 반전이 없어도 꼭 영화로도 찾아보고 싶은 책이라고, 별
다섯 개를 줄 수 있는 추천하는 책이라고, 그리고 감탄하고 말았다고.
책을 읽고 잔 그날 밤의 꿈은 참으로
판타스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