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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고독
파올로 조르다노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La Solitudine Dei Numeri Primi』Paolo Giordano
그들은 늘 같이 다니지만 이야기는 별로 나누지 않았다. 서로의 침묵에 안도하고 유대감을 느끼며 각자의 심연에 침잠했다. p.89
본래의 색깔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한순간 두려움에 목이 콱 막혔다. 그러나 곧 쓸데없는 걱정은 날려버렸다. 그녀는 어떤 행동을 하든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늘 확고해 보여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알리체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결정의 무게'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것 또한 아빠가 수년간 그녀의 뇌 속 깊이 주입한 성가신 것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또래 아이들의 거리낌 없음, 젊음이 영원할 거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갈망했다. 열다섯 살다운 생기발랄함을 원했지만 그것을 손에 넣으려 애쓰는 사이 그럴 수 있는 시간이 달아나고 있다는 데 생생한 분노가 일었다. p.109
곧 익숙해질 거야. 나중엔 눈에 보이지도 않을걸.
어떻게? 항상 거기 있을 텐데. 내 눈에 보이는 곳에.
바로 그러야. 그러니까 오히려 안 보이게 될 거야. p.154
마티아는 세상을 거부하는 마음으로, 알리체는 세상에 거부당하는 기분으로 견뎠지만, 차츰 그 두 가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인 우정을 쌓아 갔다. 오랜 부재와 지나친 침묵으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우정은 학교 담장이 조여와 질식할 것 같을 때, 유일하게 숨 돌릴 수 있는 순수하고 텅 빈 공간이었다 p.157
소수(素數)는 오직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진다. 소수는 모든 수가 그렇듯 두 개의 수 사이에서 짓눌린 채, 무한히 연속하는 자연수 안에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다른 수보다 한 발 더 앞서 있다. 소수는 의심 많고 고독한 수다. 그 때문에 마티아는 소수에서 경이를 느끼곤 했다. 때로는 소수들이 실수로 그런 수열에 놓여, 목걸이에 꿰인 진주들처럼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는 소수 역시 다른 평범한 수들처럼 되고 싶었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그럴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학 1학년 때 마티아는 소수 가운데 좀 더 특별한 수가 있다는 걸 배웠다. 수학자들은 그들을 '쌍둥이 소수'라고 부른다. 쌍둥이 소수는 근접한, 거의 근접한 두 수가 한 쌍을 이루는데, 그 사이엔 항상 둘의 만남을 방해하는 짝수가 있다. 11과 13이라든가 17과 19, 또는 41과 43 같은 수들이 그렇다. 인내심 있게 계속 세어 나가면, 이 쌍둥이 소수들이 점점 희소해지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오직 기호로만 이루어진 고요하고 규칙적인 세계에서 길을 잃은 채 더욱 고립된 소수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만난 쌍둥이 소수들은 우연의 산물이며, 결국 그들의 진정한 운명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더 세어볼 마음이 들지 않아 그만두려는 찰나 서로 꼭 붙어있는 한 쌍의 쌍둥이 소수를 만나게 된다. 수학자들 사이에선 계속 수를 헤아리다 보면 언제나 다음 쌍둥이 소수가 나타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비록 발견될 때까진 어디에 위치하는지 단언할 수 없지만.
마티아는 자신과 알리체가 그런 사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이 방황하는 두 소수, 가깝지만 실제로 서로 닿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쌍둥이 소수. 알리체에겐 그런 생각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고백하는 상상만으로도 손가락에서 수분이 한 층쯤 증발해버려 적어도 십 분은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다.
2760889966649. 그는 뚜껑을 다시 닫고 펜을 종이 옆에 내려놓았다. "이조 칠천육백팔억 팔천구백구십육만 육천육백사십구." 그는 큰 소리로 그 수를 읽었다. 혀가 꼬일만큼 복잡한 문장을 입에 완벽하게 익히려는 것처럼 한 번 더 작게 중얼거렸다. 마티아는 그 수를 자기 것으로 정했다. 세계 역사를 통들어 어느 누구도 그 수를 생각해본 적이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마 그 순간까지 그 수를 종이에 적어본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소리 내어 읽은 이는 더더군다나 없었을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다 두 줄 아래에 2760889966651이라고 썼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알리체 거야. 이 두 개도 쌍둥이 소수일지 몰라, 마티아는 생각했다. p.173
그는 마티아가 자기 주위에 파놓은 심연을 존중할 줄 알았다. 오래전에 그것을 뛰어넘으려다 그 안에 빠지고 말았으니까. 이제는 그 심연 가장자리에서 허공에 다리를 흔들며 앉아 있는 것에 만족했다. p.226
c.v.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