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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다정한 사람
은희경 외 지음 / 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하와이에 살기 시작하면서 열대의 기후에 취해 마음을 놓아버렸다. 다른 곳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이, 이곳의 아지랑이 기후에 취해 나를 녹아드는 태양의 빛에 맡겨두었던 것 같다. 그런 내려 둠이 시간이 지나 일 년이 넘었을 때, 마치 열병을 앓듯 사랑니가 아파왔고 며칠째 오락가락하는 열과 냉한을 동반한 염증으로 꽤나 고생했다. 어지러움과 무의미의 방황 속에서 텅 빈 눈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내게, 빙그레 웃으며 남편이 책장에서 꺼내 건네준 책은 다정함이 필요해, [안녕 다정한 사람]이었다.
달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은희경 외 9인(외라고 하기엔 대단한 작가들의 조합이다)이 한 사람씩 일주일간 해외여행을 떠난 여행기를 이병률 시인이 사진작가로 동행해 찍은 사진과 엮은 여행 에세이 책이다. 호주로 떠난 은희경 작가의 글을 시작으로 이명세 감독(태국), 이병률 시인(핀란드-탈린), 백영옥 작가(홍콩), 김훈 작가(미크로네시아),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뉴칼레도니아), 요리사 박찬일(일본-규슈), 가수 장기하(영국-런던, 리버풀), 신경숙 작가(미국-맨해튼), 가수 이적(캐나다-퀘백)이 이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읽는 방법은 간단하다. 책 표지에 보이는 국제우편봉투 무늬에 자신을 부쳐 그들의 여행을 훔쳐보는 것.

[은희경]
은희경에게 여행은 '낯선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탄력의 게임'이다. "애인 만나러 호주에 갔지요. 그의 이름은 와인이고요." 은희경 작가의 애인은 와인이었고, 그녀의 연인들은 와이너리에 살고 있었다.
여행이란 멀어지기 위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올 거리를 만드는 일이다. 멀어진 거리만큼 되돌아오는 일에서 나는 탄성을 얻는다. 그 탄성은 날이 갈수록 딱딱해지는 나라는 존재를 조름 유연하게 만들어준다. (p.17)
여행은 멀어지기 위해 가는 것이다. 맞아, 나는 이곳에 여행을 온 거야. 조금은 길고 긴 여행. 탄성이라는 말, 아주 적절하다.
그랜드 캐니언이나 이구아수 폭포, 안나푸르나 봉우리 같은 엄청난 규모의 자연 앞에서 나는 매번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돌아오면 그것이 내 속의 어떤 공간을 넓혔다는 느낌을 얻곤 했다. 규모의 체험이 내 삶의 내부를 넓혀, 비좁은 삶 속에서 팔을 벌릴 만큼의 공간을 마련해준다고나 할까. (p.36)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곳에 긴 여행을 떠나온 나의 경우엔 '지리적 탄력은 늘어났으나, 내면적 탄력은 안으로 작동했다.'라는 문장을 만들 수 있겠다. 은희경 작가의 글은 단어와 문장의 부재와 결핍을 느끼고 있던 나로 하여금 그녀의 글을 꾹꾹 눌러보게 하는 힘을 가졌다. 작가의 책은 아직 읽은 게 없는데 이 작가, 나와 맞을 것 같다.
[이명세]
다음 영화지를 구상하러 태국으로 떠난 이명세 감독의 여행에서는 그의 들뜸 속에도 차분함이 느껴지고, 그가 머릿속으로 펼치고 있을 상상의 나래가 나에게도 보이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이 여행지를 통해 그가 구상하고 직접 참여했던 영화는 [스파이]라는 이름으로 2013년 개봉했지만, 중간에 이명세 감독에서 다른 감독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투박한 글 속에서 그가 만드는 영화를 응원했는데 안타까웠다.
[김훈]
미크로네시아로 떠난 김훈 작가는 비글호를 타고 젊은이들의 항해를 하고 싶어 했다. 더 적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짧게 끝나서 아쉬운 김훈 작가의 글. 그의 말을 빌리자면, "들끓는 말들은 내 마음의 변방으로 몰려가서 저문다. 숲 속으로 들어가면 숲을 향하여 말을 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태어나지 못한 말들은 여전히 내 속에서 우글거린다. 열대의 숲은 '사납고 강력하다'라고 써봐도 숲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다. 열대의 숲은 사납거나 강력하지 않고 본래 그러할 뿐이다." (p.163)일까.
[박칼린]
뉴칼레도니아로 떠난 박칼린은 멀리 있는 그 아름다운 곳을 멀리 있음에 다행이라 여겼다. 박칼린의 글도 처음 읽어보는 건데, 이전에 에세이 책을 출간해서인지 부드럽게 읽히는 글솜씨가 살아있었다. 그녀는 여행지의 냄새에 특히 민감하다고 했는데, 코와 피부를 스쳐가는 한순간의 느낌들, 마법의 힘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여행 가기 전 알아보았던 그 여행지의 사진은 실제 여행지와는 완전히 달라 상상 속의 것들의 무산되는 경우가 많은데, 뉴칼레도니아는 '뽀샵'의 자연경관과 에메랄드 색상의 바다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걸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도 책에 엮인 사진의 뉴칼레도니아는 한없이 투명했다.
[백영옥, 박찬일, 신경숙, 이적]
왕가위의 도시, 홍콩으로 떠난 백영옥 작가에게는 열아홉 살의 풋풋했던 홍콩 여행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고, 요리사 박찬일의 여행기에서는 일본의 도시락 문화 '야끼벤'을 엿볼 수 있었다. 뉴욕을 방문한 신경숙 작가는 그곳에 자신의 책상을 놓아두고 싶어 했다. 캐나다 퀘백시 북미 최고의 음악 페스티벌을 방문한 이적. 퀘백은 지리적 위치만 캐나다일 뿐 프랑스 문화권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장기하]
영국으로 떠나온 장기하는 싱그러운 젊음의 기운으로 맥주를 맛보기 위해 펍을 휘젓고 다니고, 공연을 보러 다녔다. 그러다 그가 방문한 비틀스와 축구의 도시 리버풀에서 뜻밖의 향수를 느낄 수 있었는데. 영국은, 리버풀은 내게 의미 있는 장소였다. 나에게 가보고 싶은 한 곳을 고르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영국을 고를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탈리아를 꼽겠지..
[이병률]
이병률 시인의 글은 제일 마지막으로 읽었다. 책에서는 3번째 챕터에 있지만 제일 마지막에 오도록 편집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제일 좋아하는 것을 마지막에 맛보고 싶었다고 할까. 읽고 있는 지금(12월)과 딱 맞는 12월의 핀란드 탈린을 그는 만나고 왔다. 이 세상에는, 주소를 몰라도 편지가 도착하는 한 군데가 있다고 한다. 봉투에 풀칠만 하고 받는 이의 이름만, 이름을 적지 않더라도 받는 사람의 생김새를 대충 그리기만 해도 편지가 도착한다는데, 봉투에는 나라도 동네 이름도 없이 그냥 <To. Santa Clause>라고만 적혀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우체부 아저씨들은 핀란드에 산타클로스 살고 있다고 믿는듯하다'라는 빨강과 초록이 생각나는 문장, 참 마음에 든다. 실제로 핀란드 우편국에서는 1985년부터 산타 편지 프로젝트를 만들어 가능한 한 많은 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p.112
지금이 12월이라서, 12월인데 눈을 볼 수 없어서, 그리고 이병률 시인의 글이라서 더 좋았던 12월의 탈린.

(요즘은 수많은 편지와 함께 공갈젖꼭지도 도착한다. 공갈젖꼭지를 놓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산타의 선물과 맞바꾸자는 부모의 제안에 그만 솔깃해서) p.115

(산타클로스 마을이라고 알려진 핀란드 로바니에마)
다시 읽어보고 싶은 글을 꼽으라면 장소에 상관없이 단연 은희경과 이병률의 글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의 두 사람은 어느 장소로 여행했든 다시 읽어보고 싶은 글 솜씨를 자랑한다. 사실, 이미 마음속에 가고 싶은 장소를 정한 후 그 여행지의 여행서를 찾아보기에 지인의 글이나 이런 모르는 장소의 여행책을 통해 그 장소를 가고 싶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은 여행지를 위한 책이 아닌 여행자를 위한 책이니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추운 나라를 지독히도 싫어하기도 하거니와, 더운 나라의 절정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이미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주저 없이 여행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유럽을 가고 싶다. 전 세계 여행이 아닌, 유럽. 그중에서도 영국과 이탈리아.
나는 좋아하는 음식을 다시 찾아 먹고,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봤던 영화를 다시 관람하고, 봤던 책을 다시 읽어보며, 좋았던 그리고 되씹어보고 싶은 장소를 다시 방문해서 추억을 덧입히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