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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재판 -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 ㅣ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2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만일 당신이 미스터리 소설의 끝 페이지가 몇 쪽인지 확인하고 읽는다면 이 책의 끝은 450페이지가 아니라 383페이지이다. 미스터리 소설을 읽을 때면 끝에 도달할수록 얼마나 남았는지 양을 확인하며 읽는 버릇이 있는 나는 310페이지쯤 되어 갑자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때만 해도 안심했었다. 아직 읽어야 할 부분이 적어도 100페이지 넘게는 남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380페이지에서 갑자기 끝나버린 이 책을 들고 끝 페이지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는 까닭은 내가 이 책을 더 즐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 책에 깊게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4권』에 에도가와 란포가 추천하여 책을 쓰게 했다는 작가가 있었다. 그때 흘려들었던 그 이름을 이 책에서 다시 만났다. 다카기 아키미쓰. 그 외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전무후무한 100% 법정신 소설이라는 점과, 추리소설 작가 및 현직 판사인 도진기 작가의 강력한 추천사가 실렸기 때문이었다. "
법적 오류가 전혀 없는 작품. 유일한 불만은 일본 작품이라는 것이다."

한때 신극 배우였던 무라타 가즈히코가 불륜의 유부녀와 얽혀 남편을 죽이고, 끝내는 그 여자마저 죽였다는 사건으로 살인과 사체유기라는 혐의로 기소되어 형사재판이 열렸다. 하지만 피고인(무라타 가즈히코)은 두 개의 살인죄와 두 구의 사체유기라는 죄목 중 첫 번째 살인(유부녀의 남편)의 사체유기만을 시인했다. 피고인의 유일한 희망인 햐루타니 센이치로 변호사는 다른 세 가지 죄명에 대해서 무라타 가즈히코의 혐의를 벗겨낼 수 있을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 법정 내부에서 벌어지며 증인들의 진술과 검사, 변호사의 반대심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재판은 법정을 출입하는 법정 기자의 시각에서 진행되기에 전지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길고 크게 확장되는 인간관계가 짧은 시간에 한 지점에 집중되는 '재판'을 소재로 삼아 100% 책을 채우고 법 특유의 자칫 지루하고 어려울지 모를 한계를 넘어 끝까지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는 선고일을 제외한 4차례의 공판을 한 큐에 몰아 긴박하게 진행한 내용의 힘이다. 법조 경력이 전혀 없는 공학 기사 출신인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법정 재판 절차는 물론 법조인이 아니고서는 써 내려가기 어려운 법조계의 속 사정까지 실제 사건 기록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이 책은 1961년에 출간되어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읽어도 완성도가 높다. 책이 출간된 후 저자가 실제 한 명예훼손 재판에서 특별 변호사로 활약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을지 짐작 가는 바이다.
스포가 될 수 있는(본격 추리소설이 아니므로 트릭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감히 씀) '신분'이라는 소재는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래 그릇』(마쓰모토 세이초)에서도 마찬가지로 신분이란 것은 선택하지 않게 차별받아온 본인에게는 범죄를 일으킬 만큼의 발화점이 되지 않았는가. 작가도 '서자'라는 신분상의 이유로 책에서 언급된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책이 일본에 처음 출간된 1961년 이후, 이름과 형태만 바뀌어 어떻게든 계속되는 '차별'이라는 것은 해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고질적인 존재이며 책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한다.
책에서는 또한 변호사의 조력의 힘이 아주 크게 부각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사건 수에 비해 부족한 국선 변호사의 수 그리고 만만치 않은 조사비용과 시간 들 때문에 형사사건의 국선 변호사가 책에서만 큼의 조력의 도움을 주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뉴스에서 올해 실시한 국선전담 변호사 설문조사에서 피의자와 피고인의 77%가량이 국선전담 변호사 제도에서 만족을 얻었다는 결과를 보았다. 그나마 안심이지 싶었다. 햐루타니 센이치로 같은 변호사를 자주 만나지 못함은 아쉽지만 변호사의 능력 탓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최근에 읽었던 변호사의 힘을 소설상에 흠뻑 담고 있는 또 다른 법정 미스터리 소설『열세 번째 배심원』(아시베 다쿠)도 함께 읽어보기에 좋다. 책의 제목인 '파계 재판'의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