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없는 판타지 -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오혜진 외 지음, 오혜진 기획 / 후마니타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워커힐의 ‘디바’에게 무대란 어떤 곳이었을까

-할리퀸, <여성동아>, 박완서

-한없이 투명하지만은 않은, <블루>

특별히 재밌게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
오션 브엉 지음, 김목인 옮김 / 시공사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을 디아스포라 남성 퀴어의 성장 소설이라는 수식어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에게 보내는 아들의 편지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아주 밝게 빛나고 나서 명멸한 사랑 이야기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건 화자가 살려고 분투하는 삶 앞에서 초라한 설명에 불과한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밀한 슬픔과 그 슬픔 사이에서도 놓치지 않은 아름다움을 꽉 쥐고 있는 화자의 태도를 보며 내내 감탄했다.이런 고백을 들려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매일 휘청거리고 무너지기만 하는 삶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뒤라스 책이 연이어 재번역되어 나오는 가운데, 사랑하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또한 재번역되어 나온다고 해서 3년 전 적었던 어설픈 책 리뷰를 다시 꺼내본다. 뒤라스의 연인 얀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다른 모든 도서들을 뒤로하고 뒤라스만을 읽게 했던 바로 그 책. 








2017.06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이다. 먼저 작가의 약력에 관해 간단히 소개하겠다. 뒤라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지 않은 1943년 데뷔하여 전후와 21세기 이전까지 소설가,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 수필가, 실험영화 감독 등으로 장르와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벌인 예술가이다. 그는 프랑스인 부모 사이에서, 프랑스의 식민지이던 베트남 근교 지아딘에서 출생하였다. 이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지배 계급으로서의 삶은 일반적인 추측과는 다르게 순탄하지 않았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가운데서의 생활과 가족들 사이의 갈등 등은 이후에도 뒤라스 예술의 주요한 테마가 된다. 18세에 프랑스로 건너간 뒤라스는 학업을 마치고 세계대전 당시에 프랑스의 공산당원이 되어서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의 남편은 독일의 전쟁포로로 잡혀가 강제수용소에서 고통받고, 이 역시 그의 소설 <고통> 속에 나타난다. 이후로도 뒤라스는 공산당에서는 탈퇴하지만, 여전히 사회 참여적인 활동을 벌이며 그러한 메세지들을 담은 실험적인 텍스트들과 극들을 써 나간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페미니스트로서의 뒤라스의 이력이다. 1970년대 뒤라스는 보부아르, 잔 모로 등과 함께 ‘343인의 선언문’을 통하여 낙태와 피임운동 등 여성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으며, 마법사sorciere의 그룹원으로 함께하며 페미니즘 운동가로서의 활동을 한다.[1]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그의 초기작 가운데 하나이고, 다섯 번째 소설이다. 1953년이라는 발표 년도에서 추정해 볼 수 있듯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이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쓰여졌고, 전쟁의 참상과 피해를 뒤라스만의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의 배경은 이탈리아 지중해의 작은 마을, 30여채의 집이 있는 산과 강과 바다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주인공들은 프랑스인들이고, 이 마을에 바캉스를 와 있다. 이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이 소설이 시작한지 단 두페이지 만에 제시된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사흘 전, 정확히 사흘 반 전에 한 청년이 루디의 별장 뒷산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했었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뉘어지고, 합쳐 지기도 하며 함께 진행된다. a)첫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인 ‘사라’가 겪는 다른 사람들 과의 관계에 관한 감정들이 중심을 이룬다. b)두 번째 이야기는 지뢰 제거 작업을 하다 폭사당한 청년의 노부모들이 밤낮없이 계속하여 산 위의 유해 옆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의 사망신고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며 전개되는 일들이다.




첫 번째로 다룰 주제는 뒤라스가 바라본 전후사회이다. 그러기 위해 자세하게 살펴볼 것은 b)두 번째 이야기이다.


  청년은 전쟁의 잔재가 종전 이후에도 모두 해결되지 않았기에 희생당한 사람이고, 소설 안에서도 명시되어 있듯 전쟁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한 모든 것들에 대한 사회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사공은 이번의 죽음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 청년이 희생되었고 그것이 물론 직접적인 전사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분명 그건 전쟁으로 인한 희생이라고, 마을이 상중이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고 설명해 주었다.’ p265) 실제로 국제 적십자 위원회 (ICRC)의 지뢰 매설수 및 피해현황자료에 따르면 전세계에 약 1억 1천만개의 지뢰가 존재하며, 매달 약 2000여명이 지뢰로 인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한다.[2]




  청년의 이 사고, 각별히 전쟁 이후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어서 하게 된 직업 중 발생한 사고는 전후 빈곤세대를 살고 있는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아무 관계가 없는 먼 사람의 일이라고 할 지라도 가깝게 느껴질 수 있는 일 이었을 것이다. (‘”지뢰 탐지란 정말 못할 일이에요.(…)다른 할일을 찾아보려고 했었지요.” , 노인이 말했다. “그런데 군 제대 후에 다른 일은 찾을 수가 없었어요”, p244) 또한 작가는 청년의 희생이 전쟁 피해자들의 비극을 대변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삭제한다. 청년의 이름도, 어떤 인생을 살았고 무엇을 좋아했는지에 관한 것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청년의 죽음에 관해 보이는 반응은 극단적으로 갈린다. 식료품상과 지나로 대표되는 무리의 사람들은 이 일을 자신의 일로 느낀다. 식료품상의 경우, 이 사고가 있은 후 자신의 생업인 식료품을 파는 일을 포기하다시피 한 채 밤낮 노부부의 곁에 함께 머물며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주인공 사라의 친구인 지나는 그들을 자주 방문하고, 매번 요리를 한 뒤 산길을 걸어 노부부에게 가져다 준다. 한편, 사라의 남편 쟈크와 친구 루디는 그 노부부들을 불편해한다. 또한 마을을 방문한 젊은이들은 노부부의 슬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며, 이 사건 때문에 마을의 무도회가 중지된 것에 대해서 불평한다. 사람들이 보이는 이 비극에 대한 무관심함,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의 슬픔, 지나간 전쟁의 슬픔을 얼른 잊고자 하는 자기방어적 태도는 인간의 여러 이기적인 측면과 본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여러 캐릭터들이 그려내는 여러 이미지들이 모여 그려진 전후의 사회는 일관성 없이 다층적이다.






두 번째로 자세히 볼 주제는 당시의 뒤라스가 생각하고 있는 죽음의 개념이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에 관해서이다.


  먼저, 작품의 전반에 나타나 있는 '사망신고서'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살펴보겠다. 노부부가 끈질기게 거부하고있는 사망신고서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왜 노부부는 끝까지 사망신고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다가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게 되는 것일까? 소설 속 인물들은 사망신고서에 서명하지 않는 까닭으로 여러가지 이유를 추측해본다. 세관원은 노부부가 마을을 탓하고 있기에 서명에 거부한다고 생각한다. 사라와 친구들은 서명을 하지 않는 것이 세관원을 반대해서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노파의 남편은 노파가 꼼짝할 힘이 없어서 서명을 못하고 있다는, 비극 앞에 놓인 인간이 대답할 법한,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이유를 제시한다. 물론 노부부가 서명을 거부하는 데에는 위의 이유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겠지만, 노부부는 논리 정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할 이유를 거부함으로써 아들의 사망이 확정된 세계, 이성 안에서 사고하고 작동된다고 생각되었지만, 결국은 참사를 일으킨 세계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일에도 진척이 없어 보이고, 여전히 노부부는 산 위에서 사망 신고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건너편 산의 산불은 등장인물들에게 사건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불은 재앙이지만, 사람들은 불이 다가온다면 노부부가 버틸 재간 없이 대피하지 않을까 하는 잔인한 희망을 가진다. 그러나 불은 잔인한 희망에 대한 시각적인 표지이자 맥거핀일 뿐, 어떠한 실제적인 역할도 하지 않은 채 소설의 종료와 함께 잊혀진다. 노부부는 서명을 하게 되지만, 그것은 불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이 일어난 개인들의 내면적 순응이다.


2차세계대전 종전 후, 노부부가 겪었던 죽음의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뒤라스의 삶 속에도 있었다.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고통> 속의 인물이자, 뒤라스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로베르 앙텔므의 경우가 그러하다. <고통>은 1943~1945년, 나치에 의해 포로수용소에 정치 유형수로 끌려갔던 남편 로베르 앙텔므를 기다리는 동안 쓰인 뒤라스의 일기문이다.[3] 로베르 앙텔므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 아무 연락도 얻지 못하고 매일 매일 고문을 당하듯 남편을 기다렸던 그 시기의, 사망신고서에 동의하지 못한 채 남편의 생명에 관련한 정보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메고 다녀야 했던 뒤라스의 모습이 노부부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다음으로, 주인공 사라가 어부들을 보고 자연스럽게 연상한 죽은 오빠에 관해서이다. 사라는 본문 속 회상에서 조각배를 타고 죽은 오빠와 함께 오리사냥을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사라는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사라는 그러한 삶의 섭리에 익숙해졌다고 믿었으며 그런 생각에 맞춰 살려고 했다'고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던 사투를, 죽음과 남겨진 사람 간의 사투를 벌인 것이라고 회고한다. 이 지점에서는 텍스트 외부의 맥락, 뒤라스가 실제로 겪었던 삶의 맥락을 함께 살펴보면 더욱 생생한 독해가 가능하다. 뒤라스는 위 글의 첫 문단에서 언급했듯 식민지의 가난한 지배계급으로 살았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가정들과는 다르게 사교적 관계의 고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고립된 가족은 가족 내에서 더욱 끈질긴 증오와 애정을 공유하게 된다.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연인>에서 그 관계가 분명히 명시되듯, 어머니를 향한 증오와 동정심, 첫째 오빠를 향한 살의, 둘째 오빠를 향한 애정으로 가족을 향한 감정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 중 둘째 오빠는 1942년 세계 2차대전 당시에 사이공에서 폐렴성 기관지염에 걸렸으나 약을 구하지 못해서 죽었다. 이 죽음은 뒤라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작은오빠의 죽음을 들은 뒤라스는 자신 역시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4] 이러한 맥락에서 소설 속 인물인 사라의 극복 투쟁과 작가인 뒤라스 자신이 겪었던 극복을 위한 투쟁 역시 맞닿아있다.






세 번째로 살펴볼 주제는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페미니즘 코드이다. 이 코드는 여러 인물들의 관계와 대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 위해서 a) 첫 번째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첫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인 ‘사라’가 겪는 다른 사람들 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가 중심이 된다. 그는 쟈크라는 남편이 있고, 네 살 된 아이가 하나 있으며, 하녀와 함께 휴양지에서 지내고 있는 작가이다. 그러나 쟈크는 결혼한 이후에도 이미 여러 번 다른 여성과 만나고 있었으며, 지금은 부부 공통의 친구 다이아나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위태로운 관계 속에서 권태를 느낀 사라는 바캉스에서 만난 남자 쟝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부부관계의 문제 뿐만 아니라, 바캉스의 주최자이자 마을 모든 사람들의 접점이 되어주고 있는 친구 루디가 사라에게 한 말도, 쉽게 잊히지 않고 사라를 괴롭히고 있다. 루디는 자기 나름대로 아내인 지나와 고전적이자 종속적인 부부관계를 수행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고 있다.




시놉시스만 보고 판단하자면 불륜 소설을 쉽게 연상할 수 있지만, 뒤라스가 불륜소설의 통속적인 플롯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여성들의 자기결정권, 특별히 성적 자기결정권이다. 소설에 나타난 여성 인물들-사라, 다이아나-는 결혼했다는 것에 도덕적 구속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만들어 나갈 관계들을 결정한다. 남편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낯선 상대와 함께 잠자리를 가지는 사라의 모습이나, 부부인 사라와 쟈크 모두의 친구이면서 쟈크와의 성적 관계를 지속해가는 다이아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든 관계의 주체는 여성이며, 남성들은 여성의 시선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된다. 또한 남성 인물 쟈크는 소설 속에서 '당신이나 나나 같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라는 대사를 통해서 여성의 성욕이 흔히 감춰지거나 드러내지 않아야 할 것으로 터부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역시 남성과 마찬가지로 성적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수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뒤라스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사고가 선행되어도 사회의 통념은 이를 뒤따르지 않고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상황을 드러내는데, 남성인 쟈크의 경우 빈번하게 다른 여성들을 만났지만, 사라의 경우 딱 한차례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명시한다. 또한, 가부장제의 질서 속에 어느정도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결혼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은 복합적인 여성 인물 지나를 제시함으로써 드러낸다. 지나는 소설 속 몇몇 부분에서, 자기 검열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네가 한 남자하고만 섹스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네가 섹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야." 사라는 말했다. "내 생각도 그래." 다이아나도 말했다. "둘 다 어쩌면 그렇게 창녀들 같은 소리를 하니." 지나가 말했다. "나는 쉰 명하고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라는 말했다. p42) 그러면서도 지나는 타협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분명한 저항의사를 밝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나를 취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만한 가치도 없어. 내가 이미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 아니야. 내가 정말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가 진짜 너무 한다고 느껴질 때 나는 떠나. 스무 살 때처럼 떠날 거라고. (...) 절대 이 사실을 잊으면 안돼. 언제나 스무 살 그 시절처럼 떠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p38)




  사라의 친구 다이아나의 경우, 페미니스트의 전형성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우선 그는 독신주의자인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며 자유로운 연애관계를 추구한다. 또한 (보부아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삶에 안주하는 것을 혐오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호텔에서 지내고 있다. 호텔은 익명성과 자유로운 삶이 보장될 수 있다는, 여성해방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사라 역시 다이아나의 경우처럼, 상징적인 맥락에서 호텔에서 만들어갈 또다른 생활을 꿈꾸는 모습이 그려진다. ('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호텔에서 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라는 더 이상 그녀 자신의 집, 아파트, 한 남자와의 공동 생활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 그녀는 그러한 것들을 갈망했었다. 이제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만큼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었고, 이러한 시기를 다른 곳, 예를 들면 호텔의 익명성 안에서 보내기를 원했다.' p69)




뒤라스는 이렇듯 70년대에 본격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해 활동하기 전 집필한 1953년의 소설에서부터 페미니즘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그려낸 페미니즘 소설로서의 한계 역시 찾아볼 수 있다. 그 한계는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 드러난다. 제목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이 암시하는 것은 결국 이들이 바캉스가 열리고 있던 장소를 떠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볼 수 있는) 또다른 장소를 찾아 떠난다는 것이며, 이는 바캉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종식시키고 또다른 새로운 상황을 향해 감으로써 변주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사라는 결국 낯선 남자와의 관계를 종료하고 남편 쟈크와 함께 또다른 여행지로 떠나는 것을 동의함으로써, 기존의 질서에 재편입 되고, 가정을 유지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1953년대 전후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으로서 뒤라스가 겪은 혼란과 보았던 죽음의 그림자들을 담고 있다. 본문 속 노부부를 해석하여 받아들이고 있는 사라의 생각을 보면,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음과 이해할 수 없음을 상징하는 거대한 힘의 화신이 된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이해하고 살려고 결심한 것처럼 어쩌면 그녀는 더 이상 이해하지 않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른다."p52) 이 시기는 더이상 뚜렷한 인과관계의 규칙 속에 얽매여 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상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은 이미 일어났었고, 그 시기동안 인류가 파괴될 수 없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파괴되며 인간의 본성에 관해 재고해야만 하는 과제가 모두에게 닥쳐왔다. 뒤라스는 이 시대의 기억을 받아들일 수 없음의 시대, 이해할 수 없는 그 자체의 시대로 작정하여 남겨둠으로써, 휴머니즘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참고문헌 출처







 


[1]


이은숙(2008). '숲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생태여성주의적 글쓴이. 한국프랑스학논집, 61, 357-376


[2]


국제 적십자 위원회 (ICRC)-지뢰 매설수 및 피해현황


[3]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사 제공 <고통>책정보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057663)


[4] 김혜동(2002). <연인>을 중심으로 본 뒤라스와 그의 가족, 한국프랑스학논집, 20, 255-2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주톈신 지음, 전남윤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를 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 자신을 자신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기반은 무엇인가? 주톈신은 단편 소설집 <고도>를 통해 이 해답으로 ‘기억’을 제시하고 있다. 이 모든 것, 어쩌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보다도 더 중요한 것, 바로 이 기억에 대한 성찰은 <고도>의 가장 중요한 테마이다. 이 작품집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들은 제 각각의 서사와 문제의식을 통해 이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 주톈신의 성찰은 단순히 기억을 가다듬거나 기억 속으로 회귀해 머무르는 것에서 넘어서서, 기억의 맥락을 되짚어 보고 놓친 것을 찾아내며 정체성을 탐구하게 되는 긴 여정으로 이어진다.


 


 


 먼저 <베니스의 죽음>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작품 속 화자인 ‘작가’가 베니스를 답파한 기억에서부터 진술을 시작한다. 베이후이(북회)선 철도가 지나는 어느 작은 역에서 생활해 본 기억 등으로 사소한 자신의 삶을 소개하는 내용을 거쳐, ‘작가’ 자신이 글을 쓰는 장소에 따라 글의 내용이 달라진다고 고백하며, 이 이유로 글을 쓰기 위한 최상의 환경을 갖춘 카페를 찾으러 다니는 모습이 그려진다. ‘작가’가 마지막으로 정착하게 되는 카페는 어느 백화점 3층 코너에 있는, 이 소설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베니스>라는 카페이다. 소설의 내용은 이처럼 실제 장소인 베니스에 관한 작가 자신의 짧은 회고,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 소설을 써나 가는지, 심지어 소설의 전개에 맞춰 구상했던 내용을 써 내려가는 장면을 소설 안에서 중계해 주기도 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까닭이 드러난다. 바로 카페 베니스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완전히 바뀐 메뉴, 주인, 직원들은 ‘작가’에게 낯선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작가’는 이 공간의 변화를 이전의 기억 속 공간의 죽음과 동일한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이 죽음에 맞닿아 드러나는 행위는 ‘작가’가 쓰던 단편소설 속 주인공을 베니스에서 자살 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세계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어린 시절 친구들이 오래 전에 나와 소식이 끊긴 것은, 죽음이라는 낯선 길에 접어든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라는 대목은 위의 개념을 더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인식론 적인 사고에서 판단할 때 기억에서 잊혀지고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끊어진 관계는 죽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고 이는 곧 작품 전체의 주제과도 맞닿는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상실된 과거, 영영 돌아올 길 없는 그것들의 죽음을 그리워하며 애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주톈신 소설의 주요 주제 ‘기억의 성찰’이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작품은 다음 단편 <헝가리의 물>이다. ‘나’는 자신의 옷에 시트로넬라유 향이 베어 있던 것을 계기로, 안면이 없던 A와 냄새에 얽힌 기억에 관해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온갖 냄새들은 머리 속의 기억을 실어 나르고, ‘나’와 A는 기억들을 되살리는 일에 중독되어 냄새를 찾아 다닌다. 이들은 기억 속의 향과 향으로 기억해내고 싶은 사람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에서부터, 역시 시트로넬라유의 냄새를 통해 그들 앞으로 불러와진 외숙모의 죽음을 계기로 죽음에 관한 깊은 고민 속으로 빠지기도 한다.


작품 내내 기억을 찾는 일과 씨름하다 보니, 기억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 역시 나타난다. 그들에게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숨겨져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그 무언가가, 어느 날 꿀벌처럼 윙윙거리며 날아가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그땐 정말로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소설은 ‘나’와 A가 각각의 방법으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매개를 찾는 광고를 내고 그것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난다. 동시에 그들은 서로를 만나 나눈 향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소중하게 간직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토록 냄새를, 기억을 찾아서 헤매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대의 물결이 밀려오기 전에는 확고부동한 사물이란 예외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단지 일상의 모든 것이 뭔가 잘못되었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잘못되었다 라고만 느낄 뿐이다. ……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가닥 진실한, 가장 근본적인 것을 부여잡기 위해서는 아주 오래된 기억에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장아이링)"-처럼, <헝가리의 물>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자신들의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 기억이라는 실체 아닌 실체를 찾는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고도> 속 중편 <고도>는 20년 전의 고도와 지금 현재의 타이베이가 ‘너’의 기억 속에서 단단한 직조물처럼 얽혀 있다. ‘나’는 현상의 이면을 해부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놓치지 않게 붙들고 20년 전 고도의 모습을 훤히 보고 있다.


소설은 ‘그때’로 시작하는 하늘, 땀과 눈물, 사람들, 나무, 카페, 여름 밤, 배경음악 등을 구체적으로 소환하여 기억의 포문을 열고 있다. 기억하고자 하는 ‘그때’가 언제의 어느 때라는 정보를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과, 당시 유행했던 대중매체- 영화, 음악, 드라마 등-를 함께 섞어내어 드러내고 있다.  ‘너’가 돌아가고 싶은 이 시간은 또한 그때 그 고도의 공간에 변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장소 속의 풍경이기도 하다. 성, 칭수이 거리, 훙러우, 미야노시타역, 위안산, 칭광시장 등 타이완의 실제 지명이 소설 속으로 밀려들어와 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의 구체성을 더하게 한다. 마치 지도를 펼쳐 놓고 ‘너’가 제시한 그 추억의 공간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은 ‘너’가 사랑했던 A의 존재이다. A는 ‘너’의 그 모든 감정으로 매일 매일이 뒤흔들리던 아름다운 시절을 늘 함께했던 사람이다. 처음 제시되는 것은 A의 외양에 대한 서술(‘1미터 70센티의 키에, 수영 선수의 평평한 어깨와 긴 팔다리를 가졌고(…)’)이지만, 결국 후반부에 이르러 제시되는 A의 모습은 ‘너’가 은밀하게 간직해 온 개인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녀는 산센 도로의 중양목을 닮았고, 사카모토 큐의 은은한 휘파람 소리를 닮았으며, 지나간 수많은 여름을 닮았다.’)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이 고도에 관한 은유적 실체가 A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몇 번 더 읽고 나니, 소설 전체가 오히려 고도에 관한 기억이 A로 특징지어지는 과정으로 읽혀졌다. 이처럼 소중한 A는 ‘나’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화양연화를 함께했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너희 둘이서만 이곳을 찾았다. 보랏빛 꽃이 넓게 깔려 있는 땅의 끝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바다는 밝은 회색빛이었으며,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만나는 곳은 습기로 인해 흐릿하게 보였다. 너희들은 일찌감치 축축하게 젖어 버린 어깨를 기대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각자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각자가 좋아하는 영화의 비슷한 장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 여름날 백사장, 특히 해가 진 뒤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면 사람들은 무언 가에 홀린 듯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열기가 남아있는 모래사장은 너를 따뜻하게 감싸주었고, 사방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그 속에서 ‘너’는 A를 성애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지만, 사랑을 느끼고 A의 또 다른 친구를 질투한다. (‘너는 문득 A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저 단순하게 그녀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은, 네가 너무나 사랑했던, 열다섯 살 무렵 너에게 있어 부모님이나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했던 친구 A였다.’) (‘너와 A역시 영원히 헤어 지지도 말고 결혼도 하지 말자고 맹세를 했었다.’) (‘그러다 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너는 축축하고 차가운 옷이 등에 달라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심장이 아기의 꼭 쥔 주먹처럼 조여들어 작아지고 작아져서 그 자리에 쓸쓸히 매달려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다.’)


 둘의 공통점은 이 섬을 벗어나고 싶어했고, 더 넓은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너’는 원주민과 본성인과도 유리된 외성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부유했고, 타이완은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도시였다. ('너는 수시로 이 도시의 어느 부분이나 구역, 거리의 풍경 같은 것들을 네가 가 본 적이 있거나 혹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다른 도시의 어딘가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래야지만 겨우 견뎌 낼 수가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틈만 나면 네가 이곳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시험하려 했다. 심지어 너희들이 이곳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장 떠나라고 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A는 본성인인지 외성인인지 언급되지는 않으나, 비슷한 욕망을 가지고 함께 비행장으로 향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너희들은 무척이나 들떠서 들판 끝에 분명 비행장이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는 만장일치로 그곳에 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딱 하나밖에 없는 비행장까지 갔다는 것은, 출국을 하게 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남자친구를 만들고 대학을 진학하고, 졸업하는 과정 속에서 A와 ‘너’는 판이하게 다른 길을 걷게된다. ‘너’는 타이베이의 호텔 겸 쇼핑몰에서 결혼식을 올리지만, A의 청첩장 속 적혀 있는 장소는 뉴저지 카운티의 교회이다. ‘너’는 잠깐 교토에 거주하는 것 외에는 타이완에서 가정을 이루고 계속해서 살아가지만, A는 20년동안 타이완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A와 20년만에 재회약속을 한다는 것은 ‘너’가 지난시간동안 지니고 살았던 추억들과, 고도의 옛 모습들을 한꺼번에 대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A는 결국 오지 않는다. 한번 지나친 시간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A는 떠났고, ‘너’는 그 자리에 기억을 끌어안고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를 확장시켜 생각하면, ‘너’가 느끼는 더 이상 추억할 거리라고는 남아있지 않게 계속해서 변화하는 타이완과, 이에 맞서 아직도 옛 모습을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해 아무리 시간이 흐른 뒤에 가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예전에 느꼈던 추억의 모습이 남아있어 그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도시 교토를 비유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너는 예전 습관대로, 우선 신쿄고쿠 토오리 거리에 있는 니시키 텐만구 신사에 가서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너는 곧장 다케다이치라는 작은 가게로 가서,(…) 주인부부의 손녀는 부쩍 커서, 계산대에 틀어박혀 텔레비전을 보면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타이완이라는 공간이 ‘너’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길래, 왜 ‘너’는 늘 변화하는 한 가운데에 있고, 이에 낯설음을 느끼고야 마는 타이완에 남아있게 된 것일까? 앞서 ‘너’는 공간과 보존에 대한 다소 독특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있는 장소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낯선 도시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 낯선 도시를 구태여 특별히 사람들에게 귀히 여기고, 아끼고, 보호하고, 인정하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더 이상 기억할 거리가 없이 사라지고 변화하게 된다면 지리적으로 같은 곳이라고 할지라도 같은 공간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태도이다. ‘너’는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아마도 현실적인 문제와 ('이 땅에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서 사람들을 붙들어 놓을 수도 없겠지만, 사람들은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남을 수밖에 없다....) 애증의 양상을 띠는 타이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서 타이완에 계속해서 거주하고 있게 된 것이다.


 


 과거의 타이완을 찾지 못한다고 결론 내린 ‘너’는, 또한 A와의 만남도 성사되지 못한 채로, 반세기 이상의 시간차를 둔 식민시절의 지도를 들고 타이완을 여행하는 이방인이 되어 보기로 결심한다. 이는 변화한 타이완을 모두 무시한 채로 지도를 들고 위치상으로만 같은 옛 타이완을 좇아 보겠다는 소극적인 저항의식의 발현이다. 그 여행에서 ‘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들과, 엉망이 되어버린 것들에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낀다. 그러면서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다니던 학교 근처의 풍경을 지금 같이 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한다. 또 이것은 ‘너’의 딸이 살아갈 타이완과 나란히 놓이며, 이러한 삼 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서로 다른 타이완 속에서의 생활로 이어진다. 보존되지 않은 타이완들은 다른 타이완들이고, ‘너’의 추억의 장소들-마을, 댄스클럽, 극장, 카페, 서점, 유치원들-이 모두 단절되고 사라졌기에 ‘너’는 딸에게 이 도시에서 살았던 흔적을 보여줄 방법이 없다.


이 타이완들이 공존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바로 정치적 입장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너’는 타이완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정작 타이베이에 하고 있는 일들, 가령, 남쪽에 마지막으로 남은 습지를 메워 중공업 용지를 이전시키는 그런 일들은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결코 미래세대를 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억’의 가치가 동원되어서, (‘네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좋든 나쁘든 새로운 것들과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소중한 것을 잊지 않고 지켜 나가는 것의 가치를 강조한다. 작가는 이 가치를 보존하고자 하는 맥락 속에서, 변화 이전을 아직 기억하는 ‘너’를 통해 이 정치인들이 말하고 있는 진보가 과연 진보인지, 그렇지 않으면 소중한 가치와 기억을 파괴하는 행위에 불과할 따름인지를 돌이켜 성찰해 볼 거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너’가 아무리 애타게 바란다고 하더라도 타이완은 달라지고 있다. 모든 것들이 일어났던 공간에 다시 간다 하더라도 도저히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추억은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뚜렷한 색채와 촉감을 가지고 재생되고 있다는 것이 결론지어진다. 모든 작업이 끝난 뒤, 마치 죽은 도시에 바치는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처럼(‘너는 어째서 너를 있게 한 도시를 선택하지 않는 것인가?(…) 아마도, 그 도시에 있던 너에게 익숙하며 추억이 깃든 것들은 모두 너보다 먼저 죽어 버리고 말았다.’) ‘너’는 큰 소리로 울어버리고 만다.


안타깝게도 ‘너’는 이 속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정지하는 것을 선택한다. 새로운 과거와 추억이 생길 것을 미리 두려워하고, 또 다시 상실할 것들을 잠깐 누리는 것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너는 그것들과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저 잡지를 사고 커피를 마시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또, 앞으로 새롭게 상실하게 될 것들의 시작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너’는 이미 단 한번의 인생을 다 살았고, 이제 쇠잔해져 있는 인간이다. (‘생사존망에 직면했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실제로 많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너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도>를 읽으며, 무수한 기억들과 형용할 수 없이 깊고 막막한 감정들이 하나의 소설 속에서 단정히 적혀 전달되어와 느껴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결국 유한한 것의 유한성을 체감한 자만이, 주어져 있는 모든 것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가치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또한 통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자카리아 무함마드 지음, 오수연 옮김 / 강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일은 무지무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어떨 때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감정이 거의 안 느껴지는 때보다는 나은 것 같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텐데 말이다. 아주 지쳤을 때는 들어오는 것도 내치게 된다. 그렇지만 내친다고 생각해도 그걸 뚫고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것들이 있고, 그렇게 들어올 것들에 대한 기대 때문에 살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이달 초에, 겨울이 시작되고 힘들었을 때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시집을 읽게 되었다. 아담 자가예프스키를 읽고 그의 시들을 사랑하게 된 이후로 세상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시인을 손닿는 데까지 찾아봐야 갰다고 마음먹었었다. 팔레스타인의 시인이고,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시인이라는 설명에 시집을 사게 됐다.


 

팔레스타인은 고등학생 때와 대학교 1학년 때, 두 번 방문한 적이 있다. 동네의 이름들을 익히며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영어로 손으로 전하는 얘기를 들었다. 언론에 실리지 않는다는 참상을 들었다. 불안한 뉴스들이 나오는 텔레비전 앞을 지나갔다. 내가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다정했다. 인사하면 꼭 차를 대접해주셨다. 시인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다가 2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고향을 말하는 이야기가 시의 곳곳에 담겨 있다.


 



 

"




언젠가 집에 닿으리.


 

 

 

어깨에서 짐 내려 문간에 놓으리. 거기 아무도 없으리. 빈집의 문을 밀어 열고 들어가서 조용히 앉으리. 석양빛의 검이 집을 반으로 가르고: 어두운 쪽, 밝은 쪽. 나는 어둠과 빛 사이에 앉아 있으리. 과거는 냇물처럼 내 뒤로 흘러가고, 미래는 달팽이처럼 내 앞에서 꾸물대고, 나는 시간을 모르고. 거기서, 침묵 속에서, 빛과 어둠 사이에서, 나는 돌이 되리. 테두리가 부조로 장식된 거대한 바위 위 석상이 되리. 조각가의 손이 정으로 내 허벅지를 새기리: 이것이 경계. 이것이 댐. 과거의 물은 과거로 흐르고, 미래의 물은 반대쪽으로 흐르고.


 

 

 

<언젠가 집에 닿으리>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여기 주민이오. 닭을 길렀소. 하늘에 별을 뿌리고 땅바닥에 등 깔고 누워 세었소. 하나도 빠뜨림 없이 세었소.


 

해가 떨어지더이다. 문에 뚫린 구멍으로 한 다발의 석양빛이 들어와 내 가슴에 꽂혔소. 빛이 나를 죽였소. 나는 빛에 살해당한 자요. 언어가 남쪽으로 기울더니, 나는 죽어 있더이다. 나는 언어로 살해당한 자요.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


 


 

 

 

무함마드의 시에서 가장 와 닿았던 감정은 절망이다. 시의 화자들은 떠도는 사람이다. 이 떠도는 사람들이 절망을 얘기할 때, 때로는 절망이 절망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주 오랜 절망이 너무 오래된 나머지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처럼. 이 모든 절망 위에서 화자는 절망이 절망이 아니라는 듯 그 위를 거닌다.


 

 

 


 

"


 


내가 잠들면 오는 친구가 있어. 나는 묻지. "넌 어디에 있는 거야? 왜 그렇게 사라져버렸어?" 그는 미소만 짓고 답하지 않아. 말 너머의 미소, 내 가슴이 따뜻해져.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는 그가 삼십 년 전에 죽었다는 걸 깨달아. 매번 그래. 매번 나는 그의 죽음을 새로이 알게 돼.


잠 속에는 죽은 사람이 없어. 거기에는 손실이 없어. 생시에 잃은 것을 잠 속에서 찾지. 그게 내가 잠자기를 즐기는 이유야. 어떤 이들은 마지못해 잠자리에 들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듯이, 들에 나가듯이 잠자리에 들어.


 

 

 

<내가 잠들면>


 

 

 

 



 

발이 고통을 지워. 걷는다는 건 삭제의 잔치야, 앨리스.


말은 열린 들판을 그리워하지만, 사랑은 닫힌 축사야. 앨리스.


 

 

 

<한때 너를 사랑했지>


 

 



 

다만 당신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접시를 깨는 거다. 접시를 깨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는 일들이 있다. 나는 여기 이 밑에 있지만 내 영혼은 저 위로 솟구친다.


오, 이 따위 믿지 마. 시는 거짓말을 한다. 사실 나는 손이 떨리고 다리를 전다. 그런데 시는 사물을 뒤집어놓는다:


절망에 날개를 달아 하늘로 날아오르게 한다.


 

 


<접시를 깨는 이유>


 

 

 

"


 



 

시들을 읽으면서 가장 감탄하게 되는 순간은 다른 매체에서 담을 수 없는 통찰이 하나의 시 안에 담겨 있을 때 같다. 무함마드의 이 시집을 읽으면서는 화자가 느낀 통찰이 나에게 전해져올 때가 유난히 많았다.


 




"


 


'영원한'이란, 예컨대, 엄청난 단어지. 손아귀에 가득 차는 돌처럼. 나는 이 돌을 던져 죽음의 이마를 맞추겠네.


'침묵'은 제 불을 제 입으로 꺼버리는 등잔처럼 연기 나는 단어.


 


 

<언어>


 

 

 



 

그런데 없는 게 있습니다: 대추야자나무 밑에서도, 샘에서도 그걸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그거 없이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


 


뭔가가 없습니다.


저는 속이 빈 토상,


신이여, 제게 뭔가 없다는 것만 압니다.


 


<없는 것>


 

 

 

 


 

그런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청구가 아니라면,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불가능은, 신이여, 우리가 그 밑에서 태어난 나무예요.


 

<불가능>


 


"


 

 

 

 


시간을 두고 한 번, 그리고 인용하면서 두 번을 읽었는데 시간을 더 들여서 읽고 싶은 시집이었다. 때로 어떤 시집은 내가 느끼던 고통들과 감정들이 뭔지에 대해 알려주는 비밀스러운 설명서 같다. 언어로 표현되면서, 언어에 담기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들이 언어에 담겨지면서 시가 곁에 와서 앉는다. 시의 화자를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도 알아도 알아도 알 수 없는 존재들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알고 싶은 생각들이 있고 궁금한 마음들이 있다. 신경이 쓰이는 마음이 있고 공감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음악을 하면서 이 마음들을 열어놓는다는 생각을 한다. 알 수 없는 마음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