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천년학

 

거장이라는 이름을 부담스러워하는 노장 감독, 눌변이지만 또박또박 할 말을 다 하는 모습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천년학>은 임권택 감독의 백 번째 영화다. 감독의 말투처럼 영화는 눌변이다. 화자는 동호(조재현 분)와 주막집 사내 용택(류승용 분)이다. 세월을 건너 50줄에 들어선 구슬프게 초췌한 두 남자의 기억이 곡주를 주거니받거니 영화 속으로 녹아든다. 포구에 외로이 앉아있는 붉은 지붕 선술집과 홀로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소나무 그 주위로 학이 날개를 펴고 앉아있는 것 같은 나지막한 산. 유봉은 이를 선경(仙境)이라 이른다.


선경! 영화를 보는 내내 선경이 이어지고 신비감을 자아내는 동양화 한 폭 같은 장면들이 많았다. 한 많은 인물들이 진경 같은 삶을 견디기 위해 선경이 필요했을까.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을 그려나간다. 눌변의 노장감독이 표현하는 사랑은 화려하거나 유장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미세한 감정을 곡진하게 표현해내어 감탄스럽다. 아버지와 남매가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소리를 하면서 그 안에서 서로 발이 닿는 촉감, 다른 남자아이가 주는 깨엿을 절대 안 받고 외면하는 것, 남자가 준 반지를 녹슬지 않게 오래도록 잘 닦아 끼는 것, 어둔 눈으로 양은냄비에 물을 부어 석유곤로에 얹고 라면 한 봉지를 끓여서 달걀 하나 풀어 소반에 받쳐 들이는 것이다.

 



이청준의 <남도소리>로 묶인 ‘서편제’, ‘소리의 빛’ 그리고 ‘선학동 나그네’의 연작 중 ‘선학동 나그네’가 이 영화의 원작이다. 원작은 부분으로 읽었다. 영화에서, 송화가 꺾이는 소리를 되찾기 위해 폭포 아래서 피를 토하는 장면에서보다 더 감동적인 장면은 두 사람이 송화의 고향 제주 애월에서 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풍경들이다. 북은 소리의 눈이라고 했다. 동호는 사모하는 눈 먼 누이 송화로 하여금 쫓기듯 도망 나왔던 고향땅을 발로 밟아서, 소리를 가슴에 담을 수 있게 해준다. 이들은 애틋하고 애절하여 터질 듯한 가슴을 억새 흔들리는 산중턱에서 소리로 풀어낸다. 송화의 소리와 동호의 북소리가 담담한 듯 신들린 풍경에 녹아 하나로 어우러진다. 토벌대의 손에 죽은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일처럼 송화의 입으로 나오고 이들의 끊일 듯 끊이지 않는 인연의 삶이 가도가도 끝없어 보이는산천길, 바닷길과 다르지 않다.


소화는 주막집 사내에게 다시는 자기를 찾지 말라는 말을 동호에게 전하게 한다. 그들의 길, 그들의 인연은 송화의 소리와 함께 끊기려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흰 두루막을 입고 소리를 하는 장면은 사내의 환상이다. 소화를 연모했던 그 사내의 눈에 두 마리 학이 독야청청한 소나무를 휘감고 돌더니 하늘로 오른다. 비상학! 원작에서는 한 마리 학이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두 마리 학이 둥여둥여 풀어내는 춤사위처럼 소리가 풍경을 휘감고 돈다. 여기서 학이 차라리 나오지 않았더라면 동호와 소화의 흰 두루마기 학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싶어 조금은 작위적인 결말이 아쉬웠다. 달리 생각해보면 문학을 읽는 것과 보는 것의 장단점이다. 화면이 마련해주는 그림 속에 관객의 상상력이 수감되는 일, 조금은 감수해야하는 일 같다.

 




내가 뽑은 명장면은 송화의 목에 오랜만에 먹은 생선가시가 걸려 쾍쾍대는 모습이다. 송화의 맺힌 한과 기막힌 생의 곡절이 가시로 걸려 숨구멍을 찔러대고 기침을 해대며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 그녀의 한을 가장 미어지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그녀를 업고 달렸던 용택이 그의 등에 송화의 봉긋한 가슴이 비벼대던 때의 이야기를 어저께 일처럼 늘어놓으며 화색이 도니, 참 그도 평생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랑을 곁에 두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었다.

 



초반부터 1956년으로 돌아가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사 하나가 버릴 것 없이 압축되어있고 하나의 장면은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내포한다. 현재와 과거가 빠르게 자주 교차하여 속도감 있게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럼에도 전체적으로는 큰 사건 없이 담담하게 전개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이 특이하다. 격랑이 다 가라앉은 후의 바다처럼 그가 주막집 사내에게 푸는 과거사가 참으로 담담하고 그 어조에는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노력이 보인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남도와 제주의 풍경, 특히 광양의 매화 흐드러진 허공은 황홀경이다. 송화의 신산한 생에 가장 화려했다 할 수 있었던 시절을 대변하는 꽃풍경이다.


문학이든 영화든 현실을 이기는 힘을 전하려한다. 그것은 승화의 미덕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용택이 엿보는 동호와 송화의 소리풀이 장면은 두 사람만의 몫이 아니라 세 사람, 여러 사람의 몫으로 돌아온다. 쓰러져가는 주막집의 외양처럼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의 감정과 피폐해져가는 사람들의 정신을 두 마리 학이 치유하려 든다면 관념적인가. 학은 병들고 찌든 우리네 마음에 고결한 정서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정신력의 승리다.

 

 


소리로 치면 오정해의 그것보다 조명창의 적벽가와 그의 고수가 치는 신명나는 북장단이 듣기 좋았다. 동호는 소리가 싫고 북이 싫어 유봉을 떠나왔지만 오로지 송화를 찾기 위해 악극단과 싸구려 술집을 전전하며 북장단을 둔다. 그러니 그의 북장단의 얼른 듣기에도 하수의 것이다. 소리의 법제를 따지는 꼬장꼬장한 조명창과 소리는 듣기에 맞춤이면 된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뉜다. 우리 전통 소리의 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퓨전도 좋지만 정통을 잃지 않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이윤기 선생도 소리를 좀 공부하여 선보였다가 전라도 지인에게 그건 소리도 아니라고 핀잔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소리는 어렵고 그래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라면 신세대들에도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가사전달이 어려운 건 나도 여전한데 판소리 부분에서는 자막으로 가사가 흘러나와 마음에 든다. 가볍게 달뜨지 않고 진하게 달이고 달여서 엑기스만 남겨둔 것 같은 감정의 교감이 송화가 치맛자락 밖으로 삐죽 나온 발을 살짝 들여놓는 장면에서처럼 미려하다.



- 천년학 / 임권택 / 2007


- 2007년 내가 본 서른일곱 번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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