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코엘료의 "11분" 리뷰와 똑같은 제목을 달았다. 

1. 아, 말이 많다

일단 겉장을 넘기면, 저자 약력 밑에 이런 말이 나온다.

"'화장법(cosmetique)'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미용이라는 의미와 장을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보편적 질서, 즉 코스모스(cosmos)를 환기함과 동시에 그 다의적 차원에서 일종의 '가면(masque)' 즉 위장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적'은 누구일까?"

벌써 시작이 안좋다. 이런 식의 사족을 나는 싫어한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이 이야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분"리뷰에서 썼던 상황이 이 소설에서 일어나고 있다. 앞에는 이런 말이, 뒤에는 역자 후기와 인터뷰가 실려있다. 이런 상황이 드물지 않지만, 참 '말이 많다'고 느껴진다. 이야기는 스스로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거기서 들리지 않았다면 그만이다. 옆에서 그건 사실 이런 내용이라는 식의 친절한 설명은 사양한다. 뭐, 어쨌든 작가 자신이 쓴 게 아니니 작가의 책임은 아니다만.

 

2. 이야기 중에 작가가 얼굴을 들이미는 것.

이야기 속에서 화자가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작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뭐랄까, 인형극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몸을 드러내고는, 인형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격이다.

예를 들자면, 53~54쪽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실제로 그녀가 갈색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다고 얘기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넘겨짚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 어떤 색깔도 허용되지 않는 소설 속인데도, 마치 그렇게 하면 뭐가 달라지는 것처럼, 여주인공을 세세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것보다 더 짜증나는 일이 있을가요?"

의도는 알겠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청바지에 긴 생머리 아가씨'같은 표현이 불러일으킬 그 무엇. 사람의 얼굴의 아름다움을 글로 묘사한다는 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그걸 묘사해야할 대목이 나와서 짜증이 나는 심정도 이해가 갈만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써놓으면 어쩌자는 것일까.

 

3. 아, 말이 많다(2)

직접인용이 참 많다. 파스칼, 노신, 스피노자 등등. 인용하면 안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너무 많다. 그리고 전혀 가공되질 않았다. 원재료를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지 못했다.

파스칼을 인용하고 싶으면 파스칼의 사상을 대변하고 실행하는 인물을 등장시키든지(예컨대,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같은 작품을 보라), 아니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문학적으로 가공된 상태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내 등장인물이 직접 인용하는 하는 건 좀 아니라고 본다. 재료들이 제각기 따로 노는 음식이랄까.

직접인용하는 것도 모자란지 주인공 이름에 대한 설명까지 제공한다. 텍스토르란 이런 뜻이다 하는. 그러지 좀 말자. 좀.

 

4. 그래도 별 두개를 준 이유는.

코엘료의 "11분"에  별 한 개를 줬었다. 이 책이 그보다 나은 점은, 그나마 전체적으로 프로이트 이래의 정신분석학적 구도를 소설의 구도와 내용에 '인용'하면서도 관련된 사람이나 책 등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마저 했으면 정말 책을 던져버리고 싶어졌을 것이다.

 

하여튼 나에게 이 책은 원재료와 양념이 잘 버무려지지 않은 음식 같았다. 너무 빤하게 인용하는 구도랄까. 단지 직접인용만 말하는 게 아니라, 방금 언급한대로 전체 구도와 주제의식까지 '인용'이다.

 

P.S. 슬라보예 지젝 같은 사람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 지 궁금하다. 사실, 뭐 그리 궁금하진 않다. 빤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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