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술과 환영 - 회화적 재현의 심리학적 연구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차미례 옮김 / 열화당 / 2003년 8월
평점 :
나는 이 책을 보고 '바로 이거닷!'하고 냉큼 주문했고, 한 장(chapter)씩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얼마전에 다 읽었는데, 결과는 만족스럽다.
이 책이 나에게 만족스러웠던 이유는 내가 지난 학기에 시도했던 방법들을 가지고 세계적인 학자가 연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난 학기 기호학 수업, 미술비평론 수업, 도상해석학, 심리학(인지 심리학) 등의 방향에서 미술작품에 접근해 보았다. 그러나 욕심은 많고 각 분야에 대한 지식은 얕아서, 결국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는데ㅡ_ㅡ; 이 책을 보면서 차분히 정리가 되어 갔다.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이다. 이 책 초판 서문이 1959년인데, 2000년의 6판까지 나오도록 내용이 계속 보강되며 장수하고 있다. 책의 부재인 '재현적 회화의 심리학적 연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인지/색채 심리학적 연구를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이야기도 나온다. 난 이 책 전에 심리학자가 쓴 미술책을 보았는데, 이 책은 반대로 미술사가가 심리학적 연구를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6판 서문의 제목이 '이미지와 기호'인 것처럼 기호학적 연구도 어느정도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연구 중에 만난 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칼 포퍼와 로만 야콥슨 같은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재미없나ㅡㅡ?
내용에 대해서 말하자면, 아주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린다거나,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도가 될까? 미술가는 자신이 배운 전통적 기법에 따라 대상을 보게 되고 또 그리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적 미술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기법(=보는 방법)을 추구한다. 감상자도 마찬가지로 '아는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는대로 보인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저자는 방대한 영역을 탐색하지만, 내용이 그렇게 난해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각 장마다 주제에 대해서 도판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고, 다음장 시작할 때는 이전 장을 요약까지 해준다.
앞의 책소개 때문에 혹시 너무 어렵울 것 같다고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미술을 전공자가 아닌 그림을 좋아하는 보통 사람일 뿐이다. 오히려 다양한 메뉴와 설득력 있는 설명에 매료될 것인다.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는 책이다. 미술사를 보려는 사람에게 보통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권하듯이, 미술가와 관람자에 대해 궁금해 해 본 사람, 미술관에서 고개를 갸웃갸웃해본 사람, 그림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빌려서 읽을 책이 아니라, 천천히 차 한 잔과 함께 줄도 치고 낙서도 해가면서 감상할 만한 책이다.
끝으로 번역에 대해 말하자면, 예전에 '돈까밀로와 뻬뽀네'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 만큼 차미례 씨의 번역은 이번에도 괜찮았다. 하지만, 여러 분야 용어들이 나오는 통에 오역이 몇 군데 눈에 띄었다. 예컨대 19쪽에서 '뜻'이라 번역한 denotation은 '외시'가 맞다. 같은 쪽 '고유한 특징'으로 옮긴 distinctive feature는 '변별자질'이다. 또하나 아쉬운 점. 도판 대부분이 흑백이라는 사실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