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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전야
산도르 마라이 지음, 강혜경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오래전 읽었던 책들을 다시 펼쳐 보다,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은 흔적을 찾게 되면 그 밑줄에 더욱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스물 아홉에 시작한 늦여름 같은 연애. 이 책을 읽은 건 스물 다섯즈음이었다.
그럼에도 밑줄이 가 있는 부분은 절망이니 신뢰니 하는 통상적이지만 의미심장한 단어를 머금고 있다.
단어가 품는 수 많은 균열들과 수 많은 뿌리들. 그 속에 흐르는 강물의 목소리. 단어 하나에 몇 시간이고 생각에 잠길 수 있다는 걸 알게된 것이다.
스물 다섯즈음의 내가 무얼안다고 이런 감동을 얻었던 걸까.
'안나 파체카스' 그녀의 남편인 의사'임레 그라이너' 그리고 이혼 전문 판사 '크리스토프 쾨뮈베스' 두 남자는 안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고 다시금 안나를 매개로 텁텁한 재회를 맞게 되는데...
마치 연륜있는 노부인 하나가 들어가있는 듯한 : ) 산도르마라이의 문장력을 다시금 감탄하게 되는 소설이다.
p.40_ 아버지의 큰 책상 서랍에서 검은 끈으로 묶은 메모 뭉치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두번째 아내와의 약혼 시절에 주고받았던 신뢰로 가득 찬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갖가지 사소한 기록들 - 버려도 될 사소한 종이 쪽지 하나까지, 그녀와 관계된 모든 추억들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삶이 아버지에게 남긴 가장 아름답고도 쓰라린 흔적들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모아 검은 끈으로 묶어두었던 것이다.
p.43_ 그러나 그들 사이의 낯선 감정을 깨부술 진심 어린 대화는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이복 누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상황에 순응했다. 그녀는 조용하고 무심했으며 늘 삭막한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 같았다. 결국 크리스토프는 진솔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생에는 말로 표현하거나 해결될 수 없는 일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45_ 내적 좌절을 경험한 뒤 깊이 상처입은 남자는 오로지 자기 방어와 엄격함, 근접할 수 없는 소극성 그 자체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가면 뒤에 수년간 푸념도 희망도 보살핌도 없이 산산조각나버린 인생의 폐허 한가운데 욥처럼 홀로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심한 죄책감에 빠졌다.
p.116_ 한결같이 다정하게 웃고 있었지만 크리스토프는 그녀가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살면서 이곳에서는 그저 당연하게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 같았다. 삶이 주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p.151_ 그가 그라이너 쪽으로 다가가 어색하고 뻣뻣하게 오른손을 내밀자 그라이너는 악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그의 손을 재빨리 다시 놓았다. 마치 이런 순간에도 관습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p.151_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독특하고 정확한 진술
p.185_ 안나는 나의 그런 행동들을 모두 잘 참아줬어. 그러던 어느 날 내 행동이 모두 소용없는 짓이란 걸 깨닫게 됐네. 두 개의 세계가 나란히 공존하는데, 내가 뭘 어쩌겠나.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