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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2Disc)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니콜라이 그린코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Andrei Tarkovsky, <Solyaris>, U.S.S.R, 1972

희생을 전제로 한 사랑만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일까? 물론 모호하고 목적이 불투명한 질문이다. 인간은 그 스스로의 문명과 문화, 관념에 근거해 가시적 세계를 통찰하고 가치판단의 준거로 삼는다. 하지만 비물질적(비가시적) 영역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체계화된 관습과 규범 혹은 도덕, 이성....... 우리는 작지만 위대하고 강한 존재를 지향한다. 평화로운 공동체를 추구하는 우리의 가치는 고결함과 이상적 이데아를 열망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역사가 반증하듯 인간적 조건들로 접근하는 길은 험난하며, 도정의 끝은 불확실하게 흔들린다.

인간의 의지나 이성이 가진 나약성과 한계 때문일까? 우리는 때로 자신들의 본성이라고까지 여기는 휴머니티에 대해 회의적 태도와 의혹적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혹성 솔라리스 같은 곳에서라면 인간다움의 절대적 당위성은 부유하는 수초와 같이 흐느적거리는 대상이다. 본능적 욕망과 사회적 단계에서의 이기적 욕구, 사랑에 대한 갈구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흔하게 배반한다. 물론 고뇌와 번민이 수반되는 현실적 선택이라고 긍정해 버리지만, 그에 따른 인과적 상처의 크기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이성적 세계는 너무 쉽게도 다른 세계에 대해 배타적이고 위협적인 방식으로 대응한다.

심리학자 ‘크리스 켈빈’은 사유하는 바다, 혹성 솔라리스의 우주정거장에서 10년 전에 자살한 아내 ‘하리’와 재면한다. (아! 나탈리아 본다르츄크의 초현실적 아름다움이란...) 원자가 아닌 중성립자로 구성된 방문객. 정거장의 확고한 이성으로 무장한 과학자들은 그녀와 그들의 괴물들을 부정한다. 솔라리스의 살아있는 바다는 인간 무의식의 일면을 선택적으로 재생하여 그 주체들과 조우하도록 끊임없이 방문객을 보낸다. ‘하리’는 인간보다 더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지만, 이성적 인간들은 그녀의 실존을 회의한다. 그녀의 얼개를 관찰하고, 그녀의 학습을 조롱하며, 그녀의 판단을 멸시한다. 하지만 ‘하리’가 아닌 무의식의 산물로서 주체를 인식하고, 스스로의 미래를 과단하게 선택하는 것은 방문객인 그녀뿐이다. 소멸기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모습을 스크린은 감히 담지 못한다. 납득할만한 전개이다. 나에겐 시지프스적 존재로서 인간을 온전하게 표현하는 행위는 너무나 잔인할 뿐더러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느껴진다. (그렇지만 지혜로운 카뮈의 문장을 통해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상처투성이의 의지를, 그 눈동자에 대해 사색할 수 있다.)
그리고 라스트 시퀀스....... 지구로 귀환한 켈빈이 고요한 호숫가 옆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아니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보듬었다. 하지만 그 역시 솔라리스의 바다 가운데, 무의식의 섬에서의 반복적 행위임이 드러나는 순간. 불완전한 개체로서 인간의 한계를 헤아리는 감독의 인식은, 인지적 측면에서 너무나 냉정하고 예리하며, 감내할 수 없는 부조리에 대한 자각이었다.
(나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영구 순환적 관계로 이 시퀀스의 의미를 파악했다. 부디 오독이 아니기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세상을 인식하는 철학적 도구로서 영화를 선택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작품들과 관념은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솔라리스’는 가장 대중적인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이다. 그래도 미욱한 나에게는 쉽지 않은 감상이었다. 그러나 오해와 편견을 거두고 (노력하고) 관조한 ‘솔라리스’에서 찾은 것은 ‘별이 빛나는 창공이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였다. 감독은 인간의 오랜 사유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원초적 물음과 그 귀결에 대한 현명한 잠언을 동시에 던지고 있었다. 한계를 지닌 우리가 사람이기 위해서 치러야만 하는 대가. 희생의 의미에 대해서.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고, 사랑은 희생의 흔적 위에서만 잎사귀를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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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 문예출판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길지 않은 나의 인생의 가장 어두운 계절에 '아르투어 슈니츨러'를 만나게 되었다.

이 얇은 책 속의 첫 만남에서부터 그는 다짜고짜 내게 물었다. '너의 삶은 가치가 있는 것인가? 만약 그러하다면 너는 준엄한 이성 앞에서 확신할 수 있는가?' 자신만만하게 도전을 받아들였던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 젊음만으로도 족함이 없던 나에게도 삶의 확신이 없었다. 그와의 심리 게임 안에서 나는 절반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미완의 패자였다.

<사랑의 묘약>의 한 단편에서 죽음의 사자는 세상에 남겨질 젊은 연인의 반쪽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만한 인간아! 어리석은 젊음이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네가 다시 나의 시야로 들어오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다시 한번 너에게 묻겠다.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냐고.' 그때 너의 대답을 기다리겠다.'

'슈니츨러'의 세계는 가혹하리만큼 냉정하다. 그는 인간 내면의 허위의식과 오만을 그 누구보다도 효과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했다. 그의 앞에서는 아무리 순순한 감정의 소유자라도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속까지 '발가벗겨질' 뿐으로 느껴졌다. 그의 인간은 '본능적'이며 '보편적'인 사회, 개인적 '동물'이었으니까. 이점이 그를 그의 절친한 친구, '프로이트'와 한데 묶을 수 있는 특징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내게 그는 '인생을 즐기라!'라고 말해주려 한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내게 말하려했던 '즐김'은 자아의 발견을 근거로 한 치열한 감성 게임인 것 같아 보인다. 미욱한 나로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영원한 숙제이다.

지금도 이 빼어난(따로 부연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는) 소설집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한 마리 나비에게서 나는 투명한 거울 속에 비친 나를(그리고 모든 보편적 인간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 특히 프로이트 학파의 심리학 서적에 흥미를 가지고도 무거운 주제에 눌려 버리신 분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하지만 읽으신 후에 가슴속에 떠오르는 감상은 아마 가볍지 않으실 것이다. 그것이 저자가 이 작은 책을 통하여 독자에게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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