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과의 화해를 향하여 한 걸음 더 내딛다. 


자유는 권력과 같지 않다. ... 선택할 자유도 실질적인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의 중량이 어떤 식으로든 밑받침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안정을 깨뜨리는 느낌,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얄팍하고 힘없는 느낌을 줄 수 있다. p. 77-78

 

권리가 정말 나에게 있다는 실질적인 확신도 없이, 가능성들만 가득 쌓인 거대한 식탁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 내 내면에서 지글거리던 확신은, 욕구들은 위태로우며 갈망과 탐닉은 실망과 수치로 가는 관문이라는 것이었다. p. 85

 

편집자는 회의 장소에 도착해 꽤 훌륭하게-똑 부러지고 힘 있고 설득력 있게-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문밖으로 나오는 순간 수치심이 홍수처럼 덮쳐 왔다. 너무 밀어붙이고 너무 독단적으로 굴었어. ... 자신의 힘에 대한 끔찍할 정도의 불편함, 어떤 흉물스러운 분출이 일어났다는 느낌, 고압적이고 시끄럽고 억제되지 않은 자신이 노출되었다는 느낌이었다. p.171-172

 

여자의 몸은 수정하고 변장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미흡하고 결함 있고 어디 내놓을만한 게 못 된다는 믿음에 의해 강화된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상태를 점검한다. 부족함들, 결함들이 하나하나 너무나 분명히 보인다. p. 186

 

선택과 명령을 가르는 선이 얄따란 것은, 자아와 문화를 가르는 선들이 얄따랗기 때문이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이 너무 긴밀히 얽혀 있어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른 몸매를 원해’ p. 220-221

 

너무 배가 고프고 너무 절실히 필요하고 자신의 몸에 비해 그 감정이 너무 크다는 느낌, 그러므로 그 느낌들을 방출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애초에 그런 느낌을 가진 것에 대해 자신을 벌하려는 강박이다. 이 모든 행동에는 말할 것도 없이 분노가 있다. 당신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은 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너무나 많은 필요를 느끼게 했으면서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엇이었든 필요를 느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 아래에는 가장 강력한 슬픔도 자리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아이의 슬픔, 그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고 상처 입히는 아이의 슬픔. p. 33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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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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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과 자기 수용을 위하여 꼭 필요한 통찰. 여자는 자신을 위하여, 남자는 가끔 미친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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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 - 상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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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첫 책. 연말에 시작해서 지금 끝났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상하권 합쳐) 천 페이지에 3주나 걸렸다는 건 어지간히 지겹다는 뜻. 여기저기 구멍나 있던 시대의 정보를 메운 것은 매우 유익했으나 왜 항상 유익한 것은 즐거움과는 반비례하는가. 즐기는 자를 이길 방법이 없기는 하겠으나 과연 그 즐기는 자가 있는지 의문이다. 있다면 무운을 빈다. 내게 성적이의제기를 신청한 학생들은 선생들도 공부하기 싫어 몸부림친다는 사실에 적절한 위안을 받기를 바란다.
여튼 러시아 역사를 훑어보며 새삼 느끼는 것은 정말 폭력의 스케일이 남다르다는 것. 극소수 엘리트나 통치자 개인에게 너무 많은 것이 달려 있다는 것. 그 극소수가 어떻게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거기 살 대다수의 사람들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 몹시 괴롭혔다는 것. 그 대다수는 상당한 인내심과 이상주의를 갖고 '더 나은 삶'을 기다렸다는 것. 몹시 고통스러운 혁명이나 개혁이 멈추면 아주 고질적인 부패로 이어진다는 것. 이도저도 안되면 국뽕으로 타개한다는 것. 후진적인 것들은 골고루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책은 2010년까지를 다루고 있으니 그후 10년은 별개로 친다 해도 말이다. 요즘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또 조금 다르긴 하다... 그렇게 치면 한국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교양있고 양심적인데... 너무 착하고 순진해서 좀 그렇다. 엘리트 그룹은 제정 러시아의 무지막지한 부패관료들보다 영리하고 효율적이고 체면을 차리지 않는만큼 더 악랄하다. 러시아의 거부들은 구 소련의 관료나 당원 출신으로 과거의 국영기업들을 사유화하고 권력에 밀착해서 엄청난 부를 만들었지만 지금 한국의 권력은 과거의 권력으로 키운 기업의 뒤치다꺼리를 하는데 바쁘다. 어느쪽이 더 나쁜가. 전자는 사이즈가 커서 피해규모가 막대하고 후자는 민주주의의 껍질을 벗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이 가증스럽다. 내 나라는 내가 사는 나라이므로 남의 나라보다 더 나쁘다. 끝없는 국가폭력과 비틀린 민족적 자긍심의 역사를 아주아주 간략하게 요약한 천 페이지가 참 버겁더라는 이야기. 혼자 버겁기 싫어서 담벼락에 써붙여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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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지음, 손성현 옮김, 김진혁 / 포이에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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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잡히는대로, 욕망대로 읽은 새해의 세번째 책. 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공부하는구나'라고 생각한 분이 계셨는데 역시나 '쓸모'는 없었다. 무려 1차 대전 후에, 그것도 당시 신학자의 입장으로 읽은 것이라 이미 지금의 교과서적 이해가 되어버린 탓이다. 저작연대를 감안하지 않고 읽다가 '아니, 이걸 왜 이렇게 감격스러운 어조로 말씀하시나' 싶었는데 세상에서 이런 도스토옙스키 읽기를 처음 해낸 사람이 본인이라면 그럴만한 자격이 있을 터이다. 어쨌거나 도선생은 세계문학에서는 1,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재발견된 작가에 가깝고(러시아에서는 생전에 이미 '예언자'였다) 이 책은 '재발견'한 이들의 독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그럴법하지 않은가. 젊은 시절에 앞뒤 가리지 않고 과감히 선택했던 이 러시아 작가의 뜨거움과 질척거림과 집요하고 병적인 에너지는 확실히 청춘의 정신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렵다. 저자 역시 20대 중반에 도선생을 읽기 시작하여 그 감각을 이 저서에 풀어놓았고 번역자가 누누히 강조하는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에 불을 당기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새삼 이 책을 새로이 번역하여 출간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셀링포인트였을 터이고. 어쨌든 논문에 붙일 레퍼런스는 아니고 대중강의에서 더 읽어볼 책으로 권할만하다. 분량이 적고 읽기 쉬우며 목적이나 방향이 명확한만큼 논지가 분명하다.

처음 배울때 교과서적으로 입력해둔 해석이 주를 이루고 도선생을 직접 읽어본 바로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독해이니 별로 걸리는 것은 없었다. 도선생 특유의 변증법적 논리 전개를 짚어내고 러시아 정교의 부정신학을 스위스의 개신교 목회자가 읽어낸 것만 해도 대단한 통찰이다. 다만 저자가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관계로 격렬한 반역의 정신을 결국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인상이 남는다. 도스토옙스키가 낭만주의자가 아니라는 단정도 맥락과 설명이 좀 필요하다. (이때의 낭만주의를 문예학적 용어로 이해하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낭만주의'에 대한 경멸적 인상을 벗겨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악마적 인간-위대한 죄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인식을 너무 박하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욥만큼 신을 몰아붙이지 않으면 그가 눈으로 뵌 이를 볼 방법은 없는 것이다. 더욱이 '위대한 죄인'이라는 것은 낭만주의 전통에서 나온 괴물인지라 ㅋ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는 욥의 살벌한 항의와 이반의 판 뒤집기가 썩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우신 듯 하다. 하긴 그래서야 '목회'하시기가 몹시 불편해지지 않겠는가. 이런저런 개혁들을 '교회 안에서'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저자의 출신성분이 지니는 한계일 것이다. 믿음의 추구는 결국 믿지 않을 가능성과 그 자유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내용을 잃게 된다.

쨌든 '전적 타자'에 대한 강조가 당대의 필요였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은혜보다 계시를 먼저 서술하는 편이 합리적인 순서라는 생각은 해 본다. 결국 투르나이젠(바르트도 썩 다른 생각이 아닐 터이다)은 신을 '전적 타자'로 보고 별다른 설명없이 실낱같은 은혜의 여지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100여년이 지난 냉소적인 눈으로 보자면 그들 역시 전형적인 서구인으로서 신을 인식과 추구의 '대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들의 새로운 점은 그 인식과 추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당시 오지에 고립되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바흐친의 '작가와 주인공'이 말하는 타자의 존재와 그 역동이 좀더 생산적이지 싶다. 바흐친은 전적 타자의 눈앞에서 형성되어가는 인간의 자의식을 묘사한다. '우리쪽에서 절대로 인식하거나 가 닿을 수 없는 존재'는 논리적으로 옳으나 실천적으로는 절망적이지 않은가. 절망이 유일하게 정직한 실천일지라도 말이다.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실마리는 이 전적 타자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겹치거나 비껴가거나 서로의 배면에 흐르는 양상을 포착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신이 우리 시대를 버리신 것도, 포기하지 않으신 것도 모두 백퍼센트 사실이라 여기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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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1~6 세트 - 전6권
최규석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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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나온, 너무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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