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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지음, 손성현 옮김, 김진혁 / 포이에마 / 2018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잡히는대로, 욕망대로 읽은 새해의 세번째 책. 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공부하는구나'라고 생각한 분이 계셨는데 역시나 '쓸모'는 없었다. 무려 1차 대전 후에, 그것도 당시 신학자의 입장으로 읽은 것이라 이미 지금의 교과서적 이해가 되어버린 탓이다. 저작연대를 감안하지 않고 읽다가 '아니, 이걸 왜 이렇게 감격스러운 어조로 말씀하시나' 싶었는데 세상에서 이런 도스토옙스키 읽기를 처음 해낸 사람이 본인이라면 그럴만한 자격이 있을 터이다. 어쨌거나 도선생은 세계문학에서는 1,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재발견된 작가에 가깝고(러시아에서는 생전에 이미 '예언자'였다) 이 책은 '재발견'한 이들의 독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그럴법하지 않은가. 젊은 시절에 앞뒤 가리지 않고 과감히 선택했던 이 러시아 작가의 뜨거움과 질척거림과 집요하고 병적인 에너지는 확실히 청춘의 정신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렵다. 저자 역시 20대 중반에 도선생을 읽기 시작하여 그 감각을 이 저서에 풀어놓았고 번역자가 누누히 강조하는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에 불을 당기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새삼 이 책을 새로이 번역하여 출간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셀링포인트였을 터이고. 어쨌든 논문에 붙일 레퍼런스는 아니고 대중강의에서 더 읽어볼 책으로 권할만하다. 분량이 적고 읽기 쉬우며 목적이나 방향이 명확한만큼 논지가 분명하다.
처음 배울때 교과서적으로 입력해둔 해석이 주를 이루고 도선생을 직접 읽어본 바로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독해이니 별로 걸리는 것은 없었다. 도선생 특유의 변증법적 논리 전개를 짚어내고 러시아 정교의 부정신학을 스위스의 개신교 목회자가 읽어낸 것만 해도 대단한 통찰이다. 다만 저자가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관계로 격렬한 반역의 정신을 결국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인상이 남는다. 도스토옙스키가 낭만주의자가 아니라는 단정도 맥락과 설명이 좀 필요하다. (이때의 낭만주의를 문예학적 용어로 이해하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낭만주의'에 대한 경멸적 인상을 벗겨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악마적 인간-위대한 죄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인식을 너무 박하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욥만큼 신을 몰아붙이지 않으면 그가 눈으로 뵌 이를 볼 방법은 없는 것이다. 더욱이 '위대한 죄인'이라는 것은 낭만주의 전통에서 나온 괴물인지라 ㅋ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는 욥의 살벌한 항의와 이반의 판 뒤집기가 썩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우신 듯 하다. 하긴 그래서야 '목회'하시기가 몹시 불편해지지 않겠는가. 이런저런 개혁들을 '교회 안에서'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저자의 출신성분이 지니는 한계일 것이다. 믿음의 추구는 결국 믿지 않을 가능성과 그 자유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내용을 잃게 된다.
쨌든 '전적 타자'에 대한 강조가 당대의 필요였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은혜보다 계시를 먼저 서술하는 편이 합리적인 순서라는 생각은 해 본다. 결국 투르나이젠(바르트도 썩 다른 생각이 아닐 터이다)은 신을 '전적 타자'로 보고 별다른 설명없이 실낱같은 은혜의 여지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100여년이 지난 냉소적인 눈으로 보자면 그들 역시 전형적인 서구인으로서 신을 인식과 추구의 '대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들의 새로운 점은 그 인식과 추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당시 오지에 고립되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바흐친의 '작가와 주인공'이 말하는 타자의 존재와 그 역동이 좀더 생산적이지 싶다. 바흐친은 전적 타자의 눈앞에서 형성되어가는 인간의 자의식을 묘사한다. '우리쪽에서 절대로 인식하거나 가 닿을 수 없는 존재'는 논리적으로 옳으나 실천적으로는 절망적이지 않은가. 절망이 유일하게 정직한 실천일지라도 말이다.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실마리는 이 전적 타자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겹치거나 비껴가거나 서로의 배면에 흐르는 양상을 포착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신이 우리 시대를 버리신 것도, 포기하지 않으신 것도 모두 백퍼센트 사실이라 여기는 탓이다.